누가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중 하나를 이야기합니다.
“산골짜기의 다람쥐가 이리 달리고 저리 달리며 재주를 부리는 걸 보면, 재미있게 노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다람쥐는 재미를 몰라요. 그냥 본능처럼 이리저리 달리며 사는 거예요. 더 중요한 것은 사는 재미가 전혀 없을지라도, 다람쥐는 절대 자살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고 싶은가?”
법륜스님은 ‘다람쥐는 재미는 몰라도 자살하지 않는다. 그러니 너희(삶)도 자살하지 말자. 너희는 재미있게 사는데도 왜 자살하냐 ’라는 가르침을 내린 것이다.
사람에게 모든 장점을 갖다 붙이는 건 ‘모순(矛盾)’이다. 굳이 사람을 특별하게 놓고 가르침을 주겠다면 말릴 수 없다. 아니, 그냥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여과없이 받아들이면 행복할 수도 있다. 가짜행복이다. 자기세상에 행복한 왕자나 공주로 갇힌 정신병자가 가장 행복하다는 주장처럼.
일반론으론 ‘재미있으니 자살도 하는 것이다’라고 해야 맞다. 하나는 좋은 것을 가졌으니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재미도 모르는데 자살하는 다람쥐는 괜찮고 재미를 모르는데 자살하는 사람은 안 괜찮은가. 그런 사람이 있다면 아마 세상을 저주하겠지 싶다.
재미는 모르는데 자살하지 않는다.
재미는 아는데 자살한다.
이 둘은 잘 어울린다. ‘연금의 강철술사’에서의 <등가교환의 법칙>이 적용된다.
그럼 사람이라면, 사람으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반론에 머무르면 사람이나 동물이나 그 지식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재미있어도 자살하지 않는 방법(방식)’을 찾아야 한다. 스스로 찾은 것의 주인은 그 자신이니까 모순 또는 등가교환의 법칙을 벗어날 수 있다.
다람쥐가 이리저리 달리는 것이 노는 것이 아니니까 자살을 하지 않는다. 사람도 재미를 오락으로만 느끼지 않는다면 자살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이리저리 쓰레기를 줍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뛰는 등 환경과 생명을 살리는 가치를 가지고 움직이면 자살하지 않아도 된다. 가치를 가지고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덩달아 ‘재미’도 느끼면 되는 것이다.
즉 재미를 위해 뛰는 것이 아니라 뛰니까 재미도 붙는다는 의미다. 노동은 재미없지만 같은 노동을 운동처럼 하면 재미가 있어진다. 노동이 노동같지 않게, 노동이 운동같게..
힘을 쓰고 움직이는 요령을 터득하면 같은 빗자루질도 노동도 되고 운동이 되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