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에서 오는 4월20일 오후 1시 천안시민회관 소강당에서 판소리 ‘심청가’ 완창이 있다.
4시간 완창은 강산제 중 조상현류다. 정응민-조상현-박평민으로 내려오는 강산제 심청가 완창을 박평민의 제자, 곽상용씨가 첫 시도를 한다.
우리나라 산도 ‘악’자가 붙으면 힘들 듯, 판소리 중에서도 강산제 심청가 완창은 어렵고도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자칫 몸이 부서지는 통에 판소리계 대부들도 함부로 덤벼들지 못한다. 8년을 단단히 준비한 곽씨의 도전이 대단해 보이는 이유다.
판소리 무대는 흔히 소리하는 사람과 북치는 사람이, 무대 아래서는 구경꾼이 있다. 소리하는 사람은 소리와 대사(아니리), 몸짓(발림)을 한다. 북치는 사람은 북으로 장단을 맞추며 분위기를 이끈다. 판소리는 전라도 동북지역의 동편제와 서남지역의 서편제, 경기도·충청도의 중고제로 나뉜다. 원래 열두마당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거의 사라졌고, 현재는 춘향가·심청가·흥보가·수궁가·적벽가의 다섯마당만 남아있다.
강산제(江山制)는 서편제의 명창 박유전(朴裕全, 1835~1906)의 소리를 이어받은 판소리다. ‘강산’은 그의 호이다. 강산제 중 ‘심청가’는 1998년 2월21일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됐고, 예능보유자 이임례(李壬禮)가 그 맥을 잇고 있다.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29-7호로 지정된 것은 2019년 12월26일이다. 이씨는 박유전-정재근-정응민-성창순으로 이어지는 강산제의 소리를 이어받고 전승과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다.
충청도의 소리꾼, ‘녹명(鹿鳴)’이 될 터
곽상용씨는 25세 젊은 때에 서울에서 강산제 심청가를 배운 바 있다.
그러다가 8년 전(2016년) 목포에서 활동하는 박평민 스승과 인연을 맺게 됐다. 그리고 본격적인 ‘강산제 심청가’ 완창에 대한 담금질이 시작됐다.
“완창은 소리꾼의 자존심이고 자부심입니다.”
그도 소리를 하면서 지금까지 허리와 등, 목 세 번의 수술을 했다.
몸 속에서 소리의 압력 때문에 뼈가 밀려 신경을 누르게 된다. 제대로 내는 소리는 실력만큼 체력도 무시 못한다. 특히 몇 시간의 완창은 소리꾼의 영혼을 탈탈 털어간다.
그의 스승은 소리를 내는 공력이 어마어마하다. 가수가 고음을 편안하게 내듯, 소리를 편안하게 낸다.
그런 스승도 아직 강산제 심청가의 완창을 하지 못했다. 몇 번의 기회를 놓쳤고, 제작년에도 무대를 잡아놨다가 취소하기까지 했다. ‘체력’에 대한 문제다. 완창은 때때로 몸을 망쳐놓고야 만다. 소리꾼의 도전이고 운명같은 것이다.
곽씨도 2022년 완창을 발표하려다 포기했다. 당시는 체력도 체력이지만 막상 하려고 보니 공부가 덜 됐다는 스스로의 판단이 들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박평민 스승의 눈엔 연민과 위로, 격려가 담겼다.
“스승님은 제 실력을 ‘발 밑의 때’쯤으로 보시겠지만 그래도 먹칠은 안하겠구나 하는 정도랄까. 저에겐 최고의 격려고 칭찬이죠. 나 말고는 니가 최고다 하시는데, 보통 스승들의 제자사랑 아니겠어요.”
이번 완창 무대에 도움을 줄 고수는 세명이다. 고수조차 몇 시간을 혼자 감당하기로는 벅차기 때문이다. 소리꾼이 완창하듯 고수도 마찬가지다. 혼자서 완창무대를 책임져야 ‘진짜 고수’가 된다. 그래서 소리꾼의 무대에 고수가, 고수의 무대에 소리꾼이 선다.
이번 세명의 고수 중 한명인 김청만은 우리나라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고법예능보유자다. 실력이 뛰어나 모셔오듯 했다.
곽씨는 완창 후 전국을 돌겠다는 계획이다. 큰 대회를 통해 대통령상에도 도전하고, 특히 완창한 이들만 경쟁할 수 있는 대회에도 참가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인다. 활동명은 곽상용이 아닌 ‘녹명(鹿鳴)’이다.
“녹명은 사슴의 울음이란 뜻으로 먹이를 발견한 사슴이 다른 사슴들을 부르기 위해 내는 울음소리를 말합니다. 함께 하는 삶, 이 길이 내가 가야 하는 길이구나. 녹명의 삶을 살면 잘못가진 않겠구나 하는 나름의 다짐입니다.”
그가 14살 때 당시 스승으로부터 받은 ‘벽옥두(碧玉斗)’도 푸른 구슬을 쏟아낸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이후 천안의 ‘민족굿패 얼’ 대표로 쌀나눔, 노숙자 무료급식 등을 운영해오며 ‘나눔’의 뜻으로 쓰고 있다.
이제 소리꾼으로 살아갈 곽상용, ‘녹명’이 그의 새 삶을 밝히는 이름이다.
“풍물과 소리, 제 인생입니다”
곽상용씨는 아버지를 ‘한량’이라 기억했다. 소리꾼은 아니지만, 거의 근접해 있었나 보다. 장날이 되면 집이 항상 왁자지껄했다.
“모시옷 입고, 중절모자 쓰고, 하얀 고무신 닦아서 신고, 부채 들고 오는 사람이면 다 우리집으로 왔어요. 소리꾼들이죠. 당시 큰 방이 길쭉했는데 그곳에서 돌아가면서 소리도 하시고 춤도 추시고 하며 술을 드셨죠.”
다섯살배기 곽씨는 끼가 있었다. 아버지도 그걸 알고 곽씨에게만 소리며 춤을 가르쳤다. 장날, 지인들이 주르르 몰려들면 한번씩은 그가 큰방 무대에 섰다. 꼬맹이가 소리며 춤을 이리저리 영악하게 해대니 지인들은 귀엽다, 잘한다 칭찬했다. 용돈도 주셨다. 꼬맹이는 그저 사탕 사먹는 재미에 흠뻑 빠졌다.
어머니는 그런 막내아들이 싫었다. 장래가 먹구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어머니 눈치를 보다보니 풍물 쪽으로 옮겨탔다. ‘역마살’이 끼었나 보다. 중학교 2학년때 학교를 그만두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전국풍물을 야금야금 배워나갔다. 어머니의 사랑을 가득가득 받는 14번째 막둥이로 태어났으나 학교를 그만두고 전국을 떠돌던 일로 한때 사이가 안좋았다. 18세가 되어 검정고시를 봤다.
6년 전 중앙대 국악교육 석사를 졸업하고 서울국제예술원에서 전통연희과 교수로 2년간 지냈으니 어머니의 ‘한’은 늦게서나마 풀어지셨을까.
1998년 곽씨가 아내와 두 아이와 천안에 내려온 건 새롭게 살기 위해서였다.
유명한 누구누구 라인에 들어가지 않으면 풍물로는 살아가기 힘든 시대였다.
아내와 ‘가게(식당)를 하자’는 생각이었다. 탈탈 털고 부족한 돈은 은행빚을 졌다. 그리고 식당을 연 지 1년도 안 돼 보증금이고 뭐고 다 날아갔다. 잘못된 계약의 희생자가 되었다. 당시 백석동 공동묘지에서 몇 날을 펑펑 울었다.
‘인생은 새옹지마’라 했던가.
“어느날 나사렛대학교 인근 불광사의 대일스님이 제 사정을 알고 장구 무료강습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하더군요. 풍물을 안 하려고 내려왔는데 오히려 하게 된 거예요.”
인기가 많았다. 100명이 넘었다. 절에 뒤주가 보였다. 강습료는 무료였지만 뒤주에 집에서 가져온 쌀을 조금씩 채워넣는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스님이 자전거에 싣고 쌀을 나눠주러 다니는 풍경이 흔했고, 주공7단지 등 어려운 이웃들에게 직접 뒤주에서 쌀을 퍼가도록 하기도 했다. 그것이 나눔의 시작이었다. 또 하나 98년 그가 지금까지 이끄는 풍물단체 ‘민족굿패 얼’ 탄생의 시작이었다.
민족굿패 얼은 천안의 대표적 풍물단체로 성장했다. 많을 때는 회원수가 120명을 넘었다.
악착같은 열성으로 항상 최고의 기량을 보여줬다. 천안흥타령춤축제에서도 일반부 대회나 거리퍼레이드에서 대상을 거머쥐기도 했다. 전국대회 상도 다수 수상했다. 무엇보다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던 이들이 주변의 권유로 들어왔다가 치료된 사례가 많았다. 신명나는 풍물은 우울증의 인기치료제였다.
어릴 적 소리를 배우다 풍물로 갈아탔다면, 이제는 풍물에서 소리로 넘어오는 생(生)이 스스로도 참 드라마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