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애의 집은 나지막한 초가집이었다. 키 작은 그 애와 그의 가족이 드나들 때에도 겸손하게 몸을 굽혀야 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 초가집 처마 속으로 참새가 드나들기에 한없이 낮아 한참을 저공비행하며 주위를 살펴야했겠다. 추운 겨울엔 참새들에게도 더없이 따뜻한 보금자리가 되었을 터였다.
작은 우리 마을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던 우물 안 개구리 같던 어린 시절에 내 집과 이웃집과 친구네 집 밖에 모르던 때였다. 그리고 학교로 가는 울퉁불퉁한 자갈길에서 자동차가 내뿜는 매연에 섞인 휘발유 냄새에 코를 틀어막고 고개를 돌리고 입으로 숨 쉬던 때, 저만치 운동장을 가로질려 오는 그 애를 얼핏 보았을 땐 못 본 척하며 내숭을 떨었을 것 같다. 그러고 나서 교통비가 들지 않는, 걸어서 다닐 수 있는 남녀공학 중학교에 합격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늘 그렇게 그 애들과 함께 같은 교실에서 생활했건만 중학교에 가서야 새삼 남녀공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플레어스커트에 하얀 칼라의 교복을 입은 3반 여학생이고 그는 상의 하의가 검은 교복에 검은 교모를 쓴 1반인지 2반인지 모를 남학생이었다. 각각의 교실에서 따로따로 공부했다. 방학이었고 겨울이었고 명절 즈음이었을 게다. 국민학교 동창생 예닐곱이 모여 동네 앞길을 지나 논둑길을 지나 그 애의 집에 갔었던 것 같다. 어렴풋하다. 무얼 먹었는지도, 무슨 얘길 했는지, 나와 그 애 외에 다른 벗들은 누구였는지도 희미하다. 다만 좀 휘어진 벽의 찢어진 벽지 사이로 황토가 도드라져 불그스름했었던 잔영이 남아 있다.
그 애의 집 앞을 어쩌다 지나려면 발걸음이 느려졌다. 그 애가 뛰어나올까 봐 맘 조렸다. 강아지도 짖지 않는 고요 속에서는 더욱 그 집 안이 궁금했다. 바깥마당 울안에서 꿀꿀거리는 돼지에게 주려고 어쩌다 구정물통을 들고 나오는 어른의 실루엣이 보이고 인기척이 들리면 재빠르게 느린 걸음을 고쳐 보통의 걸음으로 걸어 지나갔다. 그 애는 윗방에서 꼼짝 않고 공부하는 중인 모양이다.
지금 우리 집 옆으로 시냇물이 흐른다. 불당천과 쌍정천 물이 합하여 흐르니 이 또한 두물머리다. 어릴 적 그 애의 집 앞에서 발이 멈췄던 것처럼 저절로 멈춰 서서 불당천 끄트머리 냇물을 유심히 살펴보게 된다. 2023년, 작년 여름 수해로 한쪽 둑이 무너져버렸다. 한동안 흉물스레 둑 한쪽이 허물어진 채로 방치되었다가 어느새 복구되었다. 말끔하게 조성된 냇둑을 스스로 고쳐 쌓은 듯이 자랑스레 살펴보다가 가을쯤에 우연히 냇물에서 노니는 송사리 떼를 발견하고부터 생긴 버릇이다. 도시의 한 가운데로 흐르는 물에 송사리 떼라니! 오래 잊고 지낸 유년의 풍경이 되살아나서 가슴 뛰게 하였다. 어린 날의 한 편이 떠올라 앨범을 펼친 듯.
한 줄기 비가 내린 뒤에는 으레 오빠 뒤를 따라다니며 좁은 도랑 뚝 풀숲을 장화발로 사뭇 투덕거려 건드려서는 숨어있던 송사리를, 새끼붕어를 소쿠리에 몰아넣었던 기억이 선연하다. 비 그친 후에 펼쳐진 우리들의 퍼포먼스의 결과, 그날 저녁 반찬으로 애호박과 풋고추에 바드득 졸인 민물 생선조림이 올려졌다. 엄마의 익숙한 조리솜씨로 진수성찬이 차려진 것이다. 단백질이 귀하던 시절이어서 그랬을까, 송사리조림은 요 앞 음식점 ‘곤드레예찬’ 보리굴비 정식보다 더 맛났었다.
불당천에도 겨울이 왔다. 그러나 영하의 날씨에도 흐르는 물 가운데로는 물줄기를 유지하고 흐르고 있었고 가장자리엔 얼어서 은빛이었다. 추위에 잘 견디는 능력이 있을 테지만 걱정이 되어 또 냇물을 한참동안 서서 들여다보았다. 그들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보고 싶으나 볼 수 없었던 어린 날의 그 애네 집 같았다.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 ’ 나도 모르게 불쑥 노래가 튀어나와 입속으로 흥얼거려 본다.
방구석에서 공부하느라 마당에도 나오지 않았던 그 애처럼 송사리들은 나오지 않는다. 눈이 많이 쌓인 날에는 더더욱 그들의 움직임을 볼 수 없었다. 어디쯤엔가 깊은 물이 있어서 거기로 잠시 이사갔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쌍용역으로 전철을 타러가면서 으레 냇물을 바라보게 된다. 전철 출발시간표가 5분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냇둑에서 발걸음을 멈추고는 물속 그들의 집 앞을 살펴보게 된다. 그 애들은 냇바닥 침전물과 같은 색이고 워낙 작은 몸이어서 한참을 유심히 살펴보아야 비로소 살래살래 꼬리 흔들며 유영하는 그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방아다리공원으로 운동하러 나가면서 또 한참을 서서 들여다본다.
며칠 전에 손자와 독립기념관 연못에서 잉어들에게 사료를 던져주며 놀았던 적이 있었다. 바닥에 흘린 사료를 주워모으고 손자에게서 잉어밥을 얻어 종이컵에 담으며 우리 집 앞 송사리 떼를 생각했다. 그날 갖고 갔던 손가방 구석에서 잉어 밥을 찾아와 그 애들 집 앞에 서 보니 사료는 잉어밥이지 송사리밥이 될 수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송사리에게는 너무 굵었다. 그래도 그 애들에게 휙 던져주고 보니 사료는 내 맘도 몰라주고 냇물 따라 둥둥 떠내려가고 있었다. 연못에 떠 있을 새도 없이 잉어들이 냅다 달려들어 낚아채던 풍경과는 사뭇 달라서 허탈해졌다.
물이 맑다. 엊저녁 내가 설거지한 물, 빨래한 물이 아니다. 어딘가에서 고운 필터에 걸러 내보낸 물일 것이다. 더 많은 송사리 떼가 가까운 냇물에서 헤엄쳐 놀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 살 수 있도록, 오늘은 머리감을 때 세제 없이 물로만 감아보기로 한다. 설거지할 때 쌀뜨물을 활용해 보기로 한다. 우리 집 옆으로 흐르는 물, 불당천에 송사리가 뛰어노는 풍광은 참으로 경이롭다. 그 애들이 재채기라도 할까, 기침이라도 할까, 자주 그 집 앞을 지날 때마다 발걸음을 멈추고 살펴보게 된다. 오늘은 천안문학관 당번 서는 날, 쌍용역으로 전철을 타러가면서 또 그 애 집 앞에서 발을 멈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