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에는 역사 속 이름있는 ‘묘(墓)’가 여럿 있다.
유명한 역사인물이 잠들어 있는 묘로써, 도지정문화재인 ▲신자경선생묘 ▲홍대용선생묘가 있으며 문화재 자료로 ▲홍양호묘 ▲박문수묘가 있다. 또한 ▲한명회 선생 신도비도 도지정문화재로 등록돼 있다.
신자경 선생 묘(도지정문화재)
북면 오곡리에 있는 신자경 선생 묘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69호로 1988년 8월30일에 지정됐다.
신자경(1413~1470) 선생은 조선 세조대의 공신이다. 도총제를 지낸 신효창의 아들이며 세종 17년(1435년) 사헌부 감찰, 세조 5년(1459년) 병조판서 등 주요관직을 지냈다. 이후 세조 7년에 목천현 오동부락에 내려가 살았다. 조정에서 좌의정의 관직을 내렸으나 나가지 않고 성종 1년(1470년) 세상을 떠났다.
홍대용 선생 묘(도지정문화재)
홍대용 선생 묘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101호로 1996년 2월27일 지정됐다.
천안 수신면 장산리에는 조선 후기 실학자이며 과학사상가인 담헌 홍대용(1731~1783) 선생의 묘가 있다. 그는 북학파의 선구자로 이덕무·박지원·박제가 등과 어울렸다. 특히 천문학에 관심을 기울여 지전설을 주장했으며 저서로는 『담헌서』가 있다.
홍양호 묘(문화재자료)
홍양호 묘는 1984년 5월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3호로 지정됐다.
용곡동 일봉산 자락에는 조선 후기의 문신인 이계 홍양호(1724~1802)의 묘가 있다. 영조 23년(1747년)에 진사시에 합격, 1752년에 정시문과에 급제했다.
뒤에 사간원 대사간, 사헌부 대사헌,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등의 벼슬에 올랐다. 영조실록, 국조보감, 동문휘고 등을 비롯한 여러 편찬사업을 주관하기도 했으며 지방관의 지침서인 『목민대방』을 지었다. 그밖의 저서로는 『육서경집』『고려대사기』『동국명장전』 등이 전한다.
두 차례에 걸쳐 중국을 다녀오며 석학들과 교류를 통해 이름을 날렸으며 고증학을 수용·보급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학문과 문장뿐만 아니라 글씨 또한 명필이었다는 평을 듣는데, 수원 화성의 북문 상량문이 그가 쓴 글씨로 알려져 있다.
박문수 묘(문화재자료)
박문수 묘도 1984년 5월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61호로 지정됐다.
조선 후기 문신이며 암행어사로 유명했던 기은 박문수(1691~1756)의 묘는 북면 은석산 자락에 있다. 경종 3년(1723년) 문과에 급제해 여러 벼슬을 지냈으며 영조 4년(1728년) 이인좌의 난이을 평정하기도 했다.
영조 5년(1729년) 영남절도사로 있을 때 함경도 지방에 수재가 있을 것을 예상하고 영남 제민창에 있던 조 3000석을 보내어 10여 고을의 수재민을 구한 공로로 함흥 만세교 옆에 북민비라는 송덕비가 세워졌다.
왕명을 받고 여러번 어사로 나가 탐관오리를 숙청하고 어려운 백성들의 구제에 힘썼으며 1741년 어영대장이 되어 국토를 방위했다. 죽은 뒤에는 영의정으로 높여졌다.
한명회 선생 신도비(도지정문화재)
수신면 속창리에 있는 한명회의 묘. 한명회의 묘가 아닌 신도비가 1994년 11월4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32호로 지정됐다. ‘신도비’란 죽은 사람의 평생사적을 기록하여 무덤 앞에 세운 비를 말한다.
한명회(1415~1487)는 두 딸이 각각 예종비 장순왕후, 성종비 공혜왕후가 되었으며 세조를 도와 계유정난을 성공시키면서 조선시대 최고의 영화(榮華)를 누린 인물이다.
세조에게 “그대는 나의 장량”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지략가로 알려져 있다. 세조부터 성종까지 4대에 걸쳐 임금을 모셨고 2대에 걸쳐 국구(國舅, 국왕의 장인)가 되었으며 영의정에도 두번이나 올랐다.
그러나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비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무덤을 파헤쳐 관을 쪼개고 시신의 목을 베는 부관참시(部棺斬屍)를 당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