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향숙씨는 올해 7년째 이 집에 거주하고 있다. 폐가로 착각할 정도로 이끼와 잡풀이 무성하고, 전혀 관리가 되지 않는다. 보일러는 고장 났고, 빗물도 샌다.
충남 아산시 신정로에는 한 낡은 주택이 자리 잡고 있다. 폐가로 착각할 정도로 잡풀이 무성하고, 전혀 관리가 되지 않는다. 오늘도 김향숙(78‧가명, 아산시 신정로)씨는 이 집에서 몇 마리의 개와 고양이 틈에서 잠들고 깼다.
세상과 유일하게 소통하던 TV는 고장난지 두 달이 넘었다. 출장수리를 불렀지만 너무 오래돼 더 이상 고쳐 쓸 수 없다고 한다. 답답하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다.
집 안에 들어서면 개와 고양이 특유의 냄새가 진동 한다. 만삭의 어미 고양이가 노끈에 묶인 채 낯선 방문객을 경계하며 하악질을 해댄다. 방 한편에 놓인 바구니에서는 새끼고양이들이 꼬물대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몸짓과 소리를 낸다.
개와 고양이들 사이에 살림도구들이 뒤죽박죽 뒤엉켜 있는 집안풍경은 너무 낯설다. 특히 견디기 힘들 정도로 퀘퀘한 냄새는 결례인 줄 알면서도 코를 막고 뒷걸음질 치게 만든다.
김씨는 한 겨울에 전기장판에서 개와 고양이를 안고 잔다. 냉난방 시설이 없어 한 겨울 추위와 한 여름 더위는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공포스럽다.
집안에 고양이를 노끈으로 묶어두고 있다.
방 한 구석에는 피범벅이 된 수건 몇 장이 나뒹군다. 개나 고양의 출산에 쓰인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김씨의 하혈을 처리한 것이라고 한다. 김씨에 따르면 20년 전 자궁암 판정을 받았지만 당시 진료했던 의사는 수술도 할 수 없고, 하혈도 치료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김씨에게 불규칙적으로 찾아오는 하혈은 한 번 시작되면 혈량이 너무 많아 극심한 어지럼증에 시달린다. 어지럼증으로 넘어지면서 갈비뼈 2대가 부러지는 상황도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이 자주 반복되고 있지만 특별한 대책이 없다.
김씨는 하혈이 시작되면 성인용 기저귀를 착용해야 하지만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수건으로 대체한다. 하혈을 처리한 수건은 삶거나 소독을 해줘야 하는데 개와 고양이가 밟고 다닐 정도로 전혀 위생 관리가 안된다.
김씨는 올해 7년째 이 집에 거주하고 있다. 집은 주방, 거실, 화장실, 방1개로 구성돼 있다. 입주할 때부터 보일러가 고장 났고, 빗물도 샌다고 했다. 냉난방 시설이 없어 한 겨울 추위와 한 여름 더위는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공포스럽다.
김씨는 한 겨울에 전기장판에서 개와 고양이를 안고 잔다. 또 지난여름은 이웃주민이 가져다 준 선풍기에 의지해 무더위를 견뎌냈다. 이 처럼 열악한 주거환경 때문에 함께 지내던 개와 고양이가 죽기도 했다. 개와 고양이는 누군가 김씨의 집에 몰래 버린 유기동물도 있고, 지인이 맡긴 동물을 대신 길러주기도 한다.
김씨는 이 집을 보증금 150만원에 월임대료 20만원으로 내년 3월까지 계약했다. 그러나 지난 7월부터 임대료를 내지 못해 보증금에서 차감하기로 임대인과 협의했다. 올 겨울을 지낼 것도 걱정이지만, 겨울을 무사히 보낸다 해도 그 이후가 더 걱정이다.
초등학교도 못가고 식모살이
개와 고양이 그리고 김씨는 생활공간이 분리돼 있지 않다. 밥솥이나 식수, 의류 등이 뒤섞여 위생관리가 전혀 되지 않고 있다.
김향숙씨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온 몸으로 체험했다. 김씨는 일제강점기 자원수탈과 인권유린이 극심했던 1941년 충남 태안군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5살에 광복을 맞았다. 그리고 10살 되던 해 6‧25 남북전쟁을 겪었다.
김씨네 가족은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빈민농가였다. 하루 종일 밥 한 끼 배불리 먹기도 어려운 처지였지만 김씨의 부모는 7남매를 낳았다. 김씨는 그 중 둘째로 태어나 모든 것을 오빠와 동생들에게 양보해야 했다.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힘든 처지에 공부는 엄두도 못 냈다. 김씨는 지금까지 한글을 익히지 못해 은행, 관공서, 공과금 등 어떤 문서도 스스로 작성하거나 해결하지 못한다. 이때 가장 답답하고 부모가 원망스럽다.
김씨는 어린 시절 단 한순간도 부모님에 대한 따뜻한 기억이 없다. 특히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학대’와 ‘구박’이 전부다. 어머니는 끼니조차 거른 10살의 어린 딸자식을 식모살이 보내며 모진 매질까지 해댔다. 어떤 날은 고된 식모살이를 견디다 못해 집으로 도망쳤는데, 오히려 어머니는 더 혹독한 매질로 딸을 쫓아냈다. 어머니의 매질에 쫓겨 논두렁으로 도망치다 논에 빠졌는데 어찌나 서럽던지 지금도 그때의 생생한 기억이 잊혀 지지 않는다.
두 번 스쳐간 상처뿐인 인연
김향숙씨는 18살 무렵, 한국전쟁 당시 이북에서 탈출해 남한에 정착한 청년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둘은 아산에서 방 한 칸 얻어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던 행복은 너무 빨리 끝나 버렸다. 남성은 6개월 만에 또 다른 여성을 만나 그를 떠났다. 이후 서른 일곱 되던 해 그의 사망사고 소식을 들었다.
두 번째 남성은 두 딸의 아빠인 경찰공무원이었다. 두 번째 만난 남성과는 혼인신고까지 한 후 두 아이를 김씨의 자녀로 호적에 올렸다. 당시 경기도에서 근무하던 남편은 두 아이의 양육을 김씨에게 맡기고 집안을 돌보지 않았다. 또 시도 때도 없이 끔찍한 폭행을 일삼았다.
두 아이도 아빠의 폭행이 낯설지 않은 듯 했다. 훗날 남편의 동료들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남편의 첫 부인도 남편의 폭행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심지어 남편의 가족들까지 더 이상 매 맞지 말고, 하루빨리 살길 찾으라고 충고할 정도였다.
그러나 김씨는 식당일을 하면서 남편 전처의 두 아이들을 10년간 보살피며 고등학교까지 교육시켰다. 또 전쟁고아로 떠돌던 한 여자아이를 입양해 교육시켰지만 오래 전 자신을 떠나 소식이 끊겼다.
경찰관 남편의 자녀는 오래전 호적을 정리했고, 입양한 딸은 아직까지 김씨의 호적에 남아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 연락은 두절된 상황이다.
7남매 중 3명 사망…3명 투병, 1명 연락두절
김향숙씨는 올해 7년째 이 집에 거주하고 있다. 폐가로 착각할 정도로 잡풀이 무성하고, 전혀 관리가 되지 않는다. 보일러는 고장 났고, 빗물도 샌다.
김향숙씨 부모님은 30여 년 전 돌아가셨다. 그리고 7남매 중 3명은 각각 뇌졸중, 유방암,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지금은 김향숙씨 본인은 자궁암, 남동생 폐암, 여동생은 유방암 투병 중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여동생은 불교에 귀의해 연락이 두절됐다.
김씨는 한 때 식당을 운영하며 생활이 안정되는 듯 했다. 그러나 자궁암과 희귀난치성 하혈, 어지럼증 등으로 원자력병원을 비롯한 대학병원, 각종 전문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벌었던 돈을 모두 치료비로 소진했다.
그러다 김씨는 결국 병이 악화돼 더 이상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지금도 대학병원에서 정기적으로 방사선 치료를 비롯한 각종 검사와 치료를 받아야 한다.
최근에는 유방암 투병중인 여동생이 김씨의 생활을 돌봐주고 있다. 김씨와 15살 차이인 여동생은 낮에 폐지를 수집해 모은 돈과 자녀들에게 받은 용돈을 김씨의 생활비로 도와주고 있다. 김향숙씨는 “내가 주변에 너무 큰 민폐를 끼치고 있다”며 “하루 빨리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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