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심회 결성, 민족의식 전파한 불교계 독립운동가
백초월 선생.
독립기념관(관장 김능진)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백초월 선생을 2014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6월 한달간 독립기념관 야외 특별기획전시관에서 그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다음과 같이 개최한다.
여기서는 백초월 선생 가족사진 등 관련 자료 15점이 공개될 예정이다.
백초월 선생은 1878년 2월 17일 경상남도 고성군 영오면 성곡리에서 부친 백하진(白河鎭)과 모친 김해 김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891년 지리산 영원사(靈源寺)로 출가한 선생은 해인사(海印寺)에서 불교경학 공부를 마쳤다. 이후 영원사 주지를 역임하고 청주 용화사(龍華寺) 등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선생은 1919년 4월 서울로 올라와 중앙학림(中央學林) 내에 한국민단본부(韓國民團本部)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독립군에게 전달했다. 또한 국내외 독립운동을 소식을 알리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혁신공보(革新公報)’라는 비밀신문을 발간·배포했다.
1919년 하순 국내에서 추진된 제2차 만세운동시위 당시 배포된 독립선언서에서 선생은 국내인사 33명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렸다. 1920년에는 일본에서 3·1운동 1주년 기념 만세운동이 계획되자 이에 동참하고자 직접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경은 당시 국내 불교계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선생을 탄압하고자 1919년 12월부터 수차례에 걸쳐 선생을 붙잡아 고문을 자행했다. 선생은 가혹한 고문으로 건강이 악화됐으나 비밀단체인 ‘일심회(一心會)’를 결성하고 ‘한 마음이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취지 아래 불교 교리와 민족의식을 전달하는데 힘을 쏟았다.
1939년 10월 선생과 일심회 회원들은 중일전쟁에 따른 전시동원체제에 맞서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철도국 노동자 박수남(朴壽南)이 대표로 1939년 10월14일 중국 봉천(奉天)으로 떠나는 군용열차에 ‘대한독립만세’를 썼다. 이른바 ‘용산역 낙서사건’의 배후로 일경에 붙잡혀 옥고를 치룬 선생은 출옥 후에도 군자금 모금 활동을 계속하다 또다시 붙잡혀 청주교도소에서 수감 중 1944년 6월 옥중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정리/이진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