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은 누군가의 딸이자 아내, 동료이자 엄마로 살아가는 서른네살 경력단절 여성의 삶을 통해 한국사회 여성들이 맞닥뜨린 차별과 불평등 문제를 고발한 작품이다. 2016년 10월 출간된 조남주 작가의 장편소설로, 영화로도 만들어져 무려 360만명 넘게 본 화제작이다.
79년생 백지은 작가(서양화가·천안)를 보며 나는 왜 김지영을 떠올렸을까.
백 작가는 사회적 차별이나 불평등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가에 대한 사회적 시스템이 잘 되어 있다고 했다. 대화하는 내내 그녀는 잘 웃었다. 웃음속에 그의 삶에 대한 투지가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10월 한달동안 천안 신방도서관 한뼘미술관(1층 카페)에서 열다섯번째 개인전 ‘헬로, 조나단’ 전시를 가졌다.
여기서 언급된 ‘조나단’은 사람이 아닌 갈매기 이름이다. 비행(飛行)을 먹이 구하는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갈매기들과 달리 조나단은 그저 하늘을 나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새이다.
“코로나19 시기에 답답함을 느꼈죠. 내 작업에 집중할 수 없다는 이유로 화실에서 수강생을 가르치는 것에도 지쳐 있었고요. 22년 10월엔가 과감히 화실을 접고 엄마의 집으로 들어갔어요.”
▲ 고고한 갈매기, 조나단. 자유를 구가하면서도 남 앞에 당당한 백지은 작가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킨 작품이기도 하다.
-내가 조나단을 만났을땐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작가로서의 경력단절이라는 위기가 찾아와 그림에 대한 자신감도 떨어지고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된 후 부적처럼 지니고 온 꿈을 향한 신념이 흐릿해져가고 있을 때였다.-
<작가노트>
갈매기의 본능이 순수하게 나는 것 자체라 생각하는 조나단처럼, 그녀는 오직 그림 그리는 일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갈매기 조나단과 화가 백지은이 오버랩되는 세상이다.
화풍이랄까. ‘묵직한 밝음’을 좋아한다는 백 작가. 하늘과 바다를 배경으로 삼는 갈매기를 주제로 삼아서일까. 전시작품 전체가 파랑으로 물들어 있다. 그런데 하늘색이어야 하는 하늘도 파란 건 왜일까.
“제가 멜랑콜리(melancholy)한 상상을 좋아해요. 그래서 작품도 오래 걸리고 쉽게 안 나오죠.”
그녀의 멜랑콜리는 우울의 뜻보다 ‘깊은 생각’이 맞나 보다. “아,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같은 걸 좋아하나 보네요. 그냥 토끼가 아닌 시계토끼처럼.” “네, 맞아요. 보이는 그대로보다는 약간 비튼다고 할까요. 사진과 다른 그림의 영역이죠.”
그러고 보니 그의 작품들이 대체로 ‘동화적 이미지(색감)’가 강하다. 현실의 세계보다는 ‘나니아연대기’같은 환상적인 세상이 엿보인다.
또다른 특징이라면 뜬금없이 ‘의자’가 등장한다는 거다.
▲ 작업과정은 고되고도 즐겁다.
“조나단은 이번 전시로 끝이겠지만 의자는 못버려요. 앞으로도 제 작품에서 계속 등장할 겁니다.”
그녀는 의자를 결핍으로 해석했다. 꿈꾸는 삶을 이루지 못한, 또한 온전히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희망적 욕구를 ‘의자’가 연결시켜 주는 메신저(messenger)같은 거다.
그녀의 꿈은 ‘멋진 디자이너’였다. 그러나 간절히 원하는 크기만큼 시련도 던져주는 것이 생(生)인가 보다. 스무살 때 교통사고로 휠체어와 함께 하게 됐고 손가락 사용이 부자연스러워지면서 ‘그림그리는 화가’로 방향을 꺾어야 했다.
“그림 그리는 것도 쉽지는 않지요. 일단 체력적인 것도,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불편함도, 손을 자유자재로 쓰는 문제도, 참 여러 가지가 걸려요. 그럼에도 제가 잘 하는 것이 집념이랄까요.”
재능은 차치하고, 억척스러운 노력이 있었기에 연이 닿은 프랑스 파리에서 작품을 전시하며 제법 좋은 가격으로 판매도 되는 화가로 성장했다.
스스로 ‘계획형 인간’이라는 그녀. 이번 전시 이후 대략 3년쯤 잡고 100호 그림작품에 도전해 좀 더 큰 화가가 되고싶다는 포부도 내보인다.
“세계적으로 나가고 싶어요. 캐나다든 뉴욕이든 계속 전 세계를 돌며 전시회도 갖고 이름있는 화가로 알리고 싶죠.”
그가 말하는 큰 무대는 큰 작품으로 도전해 데뷔하겠다는 의지가 높다.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작업환경을 고려하면 고된 일이기도 하다.
사람들과 어울리면 재밌는 사람이라 말하는 그녀. 하지만 작업은 외롭게 작업해야 좋은 작품을 낼 수 있다는 그녀. 항상 든든한 어머니가 옆에 있으니 실력을 바짝 키워 ‘큰 사람’이 되도록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그녀에게 ‘갈매기의 꿈’은 바로 자신의 꿈이고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