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닫기
뉴스등록
맨위로

축산농민들은 왜 앞 다퉈 멀쩡한 소를 죽였나

죄 의식 없는 '양심 없는 사회'

등록일 2014년03월09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여든 살 한 노인과 수명을 두 배 이상 훌쩍 넘긴 마흔 살 늙은 소 한 마리. 잔잔한 감동을 전한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는 늙은 농부와 늙은 소에 대한 이야기다. 

시도 때도 없이 아파오는 머리, 다리마저 불편한 노인이지만 소 먹일 풀을 베기 위해 늘 바쁘다. 무농약 풀을 먹이기 위해 논에 농약도 치지 않는다. 둘은 누가 봐도 부럽기 만한 삶의 동반자다.

어린 시절 부모님도 늘 사람보다 소를 먼저 챙겼다. 끼니도 먼저 챙기고, 사람이 아픈 것 보다 소가 아플 때 더 신경을 썼다. 학자금과 농사 밑천으로 어린 송아지를 팔 때면 목이 쉬라고 울어대는 어미 소를 어루만지며 안쓰러워 했다. 말 못하는 소는 또 하나의 자식이었고, 생명이었고, 말동무였다. 논밭을 갈고 달구지를 끄는 듬직한 일꾼이었다. 평생 흙을 일구며 살아왔지만 가축과도 공감하는 '감수성'을 잃지 않았다.

<워낭소리>에서 가축재해 보험사기까지

최근 충남지역 축산농가들과 축협·낙협(낙농업협동조합) 직원 등이 연루된 가축재해보험 사기 사건에 대한 중간수사결과가 나왔다. 충남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최근 멀쩡한 소를 병든 소라고 속여 가축재해보험금을 챙긴 혐의(사기 등)로 모두 300여 명을 입건했다고 밝혔다.

소들의 입장에서 보면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소들이 끼니를 챙겨주던 소 주인들에 의해 죽어갔다. 어느 날 갑자기 주인이 다가와 바닥에 넘어뜨려 일어나지 못하도록 한 뒤 도축장으로 끌고 갔다. 멀쩡한 소는 질병에 걸리거나 새끼를 낳다 죽은 것으로 둔갑돼 죽어갔다. 수의사도, 보험금을 지급업무를 맡고 있는 축협과 낙협직원도 가세했다. 지난 2010년부터 지난해 초까지만 충남에서만 수천 마리의 소들이 이렇게 목숨을 잃었다.

경찰은 사기 규모가 가장 큰 당진 축·낙협에 대한 수사가 마무리 되는 대로 예산과 아산, 홍성지역으로 수사를 확대할 예정이다. 충남지역에서 부당하게 보험금을 수령 지급한 금액은 약 102억여 원으로 잠정 집계됐다. 이중 당진 축·낙협이 86억여 원(낙협 56억 원, 축협 29억 원)으로 가장 많고, 예산 축·낙협 6억8000여만 원, 아산 축·낙협 5억6000여만 원, 홍성축·낙협 4억5000여만 원 순이다.

멀쩡한 소를 죽인 이유는 단 하나, 가축재해보험금을 타먹기 위해서였다. 충남 당진과 부여, 논산, 예산, 아산, 천안 등에서 지난 2년여 동안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살이 잘 찌지 않아 사료만 축낸다는 이유로 죽어갔다. 멀쩡한 소들이 축산농민들에 의해 강제 도축됐다. 그런데도 누구 한 사람 죄의식을 갖지 않았다. 이들에게 소는 걸어 다니는 돈일 뿐이었다.

소 주인들은 가축재해보험에 가입된 멀쩡한 한우와 젖소에게 안정제를 맞춘 뒤 쓰러뜨렸다. 이어 병든 소로 꾸민 수의사의 허위 진단서, 그리고 매매계약서를 첨부해 보험금을 신청했다. 소 한 마리당 적게는 50만 원, 많게는 350만 원을 받았다. 모 가축주의 경우 이 기간 무려 2억여 원의 보험금을 챙겼다. 가축주들은 죽은 소들이 아무런 이상이 없는 만큼 제값을 받고 다시 판매, 이중으로 수익을 챙겼다, 경찰은 보험금 부당 수령액이 억대에 이르는 가축주 4명을 구속했다. 4일 현재까지 충남 일부 지역에서 사기 혐의로 불구속 입건된 축산주는 258명이다.

가축주-소 운반상-수의사-축협·낙협 직원-조합장까지 한 통속

소 운반상은 한 마리당 10만 원씩 받고 멀쩡한 소를 쓰러뜨리는 일을 돕고 도축장까지 운반해 줬다. 수의사는 소를 진단하지도 않고 사진만 보고 허위 진단서를 발급한 후 수수료를 받았다. 현재까지 소운반상 19명, 수의사 7명이 불구속 입건됐다.

축협·낙협의 가축재해보험 담당 직원들은 소 사육농가들을 대상으로 "낸 보험료의 두 배 이상을 타 먹을 수 있게 해 주겠다"며 오히려 불법을 권유했다. 충남 일부 지역에서 이 일로 불구속 입건된 축협과 낙협직원은 18명에 이른다. 특히 구속된 당진축협 전·현직 직원 2명은 보험금 청구서류를 위조를 돕는 데만 그치지 않고, 소 사육농가들 몰래 통장을 만들어 보험금을 빼돌리고, 보험료를 부풀려 청구하는 등의 방법으로 7억2000만 원을 가로챘다.

조합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진낙협 이아무개 조합장은 자신이 키우는 소를 통해 수천만 원의 보험금을 타냈다. 부여낙협 조합장은 부여낙협 명의로 직영하는 소를 이용, 같은 방법으로 수천만 원의 보험금을 챙겼다.

죄 의식 없는 '양심 없는 사회'

경찰에 따르면 보험에 가입한 대부분의 가축주들이 보험사기를 벌였다. 경찰 조사과정에서 죄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입건자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은 수사당국이 처벌기준을 '일정 금액 이상'으로 대폭 완화한 때문이다.

양심이 없는 사람들의 사례와 마주하는 것은 절망스러운 일이다. 폭등한 사료값 등으로 어려워진 농가현실을 도외시하자는 게 아니다. 단지 돈으로 작동되는 경쟁사회를 탓하려는 것도 아니다. 내 손으로 키운 소를 넘어뜨려 죽이고도 가책조차 없는 양심 없는 사람들을 만들어 낸 '양심 없는 사회'가 두려워서다.

정신을 차리고 우리 곁에 소리 없이 우는 이들의 아픔과 슬픔에 공감하는 감수성이 필요한 때다. 그 대상은 대부분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이겠지만 때론 가축일 수도, 마당 앞 나무 일 수도 있다.

충남지역언론연합 심규상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관련뉴스 - 관련뉴스가 없습니다.
유료기사 결제하기 무통장 입금자명 입금예정일자
입금할 금액은 입니다. (입금하실 입금자명 + 입금예정일자를 입력하세요)

가장 많이 본 뉴스

종합 뉴스 라이프 우리동네 향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