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참여예산지원단 구성 논란, ‘각자의 길 가나’ 우려도
파트너십 인정하고 서로 협력해야 성공할 수 있어
자본주의 경제체제하에서 가정, 단체는 물론 국가단위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민감하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바로 ‘돈’이다.
행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 역시 예산이다.
얼마만큼의 돈을 확보하고 어떤 곳에 어떤 목적으로 잘 쓸 것인가를 결정하는 예산 편성은 행정의 목표를 달성하기위한 가장 근본적인 수단이기도 하다.
‘주민참여예산제’는 기본적으로 이렇게 행정이 독점해 온 예산편성권을 주민들과 공유하자는 개념으로 ‘지방자치 이념’과 ‘재정민주주의’를 구현하는 제도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지방재정법 제39조(시행령 46조)개정에 따라 전국 대부분의 자치단체는 2011년 9월9일까지 지방예산편성과정에 주민이 참여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했다. 천안시의회도 지난해 9월6일 제150회 임시회에서 ‘주민참여예산제 운영조례안’을 통과시켰다.
주민이 예산편성 과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길은 이미 제도적으로 열려있다. 하지만 이 과정이 과연 제도 본연의 취지를 살려가면서 제대로 뿌리 내릴 수 있을지는 별개의 사안이다.
본보는 창간14주년을 맞아 천안시 주민참여예산제의 현황과 전망을 내다 볼 수 있도록 하는 지면을 준비했다.
<편집자주> |
조례제정 갈등, 이후로 깊어진 감정골
천안시의 ‘주민참여예산제 운영조례’는 기나긴 산통 끝에 태어났다.
그 과정에서는 천안시와 다른 참여 주체들은 팽팽한 신경전과 줄다리기 과정을 겪었다.
1년여 간 주민참여예산제를 두고 함께 연구하고 고민해온 천안시는 지난해 8월, 갑작스레 독자적인 조례안을 발의했고 천안시의회도 자체적으로 조례안을 발의해 한가지 사안을 두고 시와 의회의 조례안이 대립하는 유례없는 장면이 연출됐다.
조례안을 심사할 총무복지위 소속 시의원 7명이 추진단에 참여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가 조례안을 독자 발의한 것에 대해 외부에서는 ‘민관협치의 뜻을 저버린 천안시의 돌발행동’이라는 비난을 쏟아냈다. 결국 어려운 협상 끝에 작은 협의를 거친 양측은 천안시의회의 조례안을 소폭 수정해 통과시켰다.
하지만 이후 소원해진 양측의 관계는 이제 마치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주고 있다.
2010년부터 함께 주민참여예산제를 고민해 온 천안시는 조례안이 통과된 9월 이후 시의원, 시민단체들과 공식적인 만남이나 의견을 교류한 적이 거의 없다.
시는 독자적으로 ‘주민참여예산 지원단’의 운영계획을 밝혔고, 시민단체는 시민단체대로 활발한 준비작업을 펼쳐가고 있다. ‘복지세상을 열어가는 시민모임’ 등은 천안주민참여예산 촉진가 교육, 청소년이 만드는 천안시 참여예산 프로젝트 등을 이미 진행했거나 진행 중이며, 오는 5월3일에는 2012 천안주민참여예산 원탁회의를 예정하고 있다.
천안시는 4월중 주민참여예산지원단의 구성 및 1차 회의를 마무리 짓고 5월 주민참여예산 지역회의 구성방안 마련, 올해 상반기까지 주민참여예산위원회 및 지역회의를 구성할 계획을 내놓고 있다.
조례를 운영할 주요 두 동력이 각자의 길을 가며 그 간극을 벌려가는 모양새다.
양측의 입장을 단순화 시켜보면 이처럼 간극이 벌어지는 이유는 바로 ▶지원단의 역할 등 제도자체에 대한 인식차 ▶시민들과 시민단체에 대한 신뢰의 차이로 정리할 수 있다.
지난 4월3일 열린, 천안주민참여예산 촉진가 교육. 오는 5월3일 시청 대회의실에서는 2012 천안주민참여예산 원탁회의가 열릴 예정이다.
천안시, ‘지원단 구성원 전부가 실무자일 필요는 없다’
“주민참여예산제를 대표 발의한 시의원도 빼고, 전국 지자체마다 서로 모시려고 하는 전문가마저 배제하다니 천안시는 주민참여예산제에 대한 의지가 있기는 한 것인가? 시는 더 이상의 독자행동을 그만둬야 한다”
“10명의 지원단 구성원 모두가 실무자일 필요는 없지 않는가. 예산팀장이 지원단내 ‘간사’로 실무자의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지원단 내부에서 위촉된 지원단 구성원들의 의견을 잘 정리하고 전달해 ‘주민참여예산위원회’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 자신있다.”
시는 올해 초, 주민참여예산제의 효율적 운영을 위한 ‘주민참여예산 지원단’ 운영계획을 발표하고 향후 계획과 관련한 로드맵을 내놨다. 하지만 그 첫 단추부터 뜨거운 논란을 낳고 있다.
주민참여예산지원단은 ▷주민참여예산제운영조례 및 규칙 제개정에 대한 의견 제시 ▷주민참여예산 운영계획 수립에 대한 의견제시 ▷주민참여예산제도의 운영에 대한 지원활동 ▷주민참여예산제 운영 모니터링 및 개선방안 마련 ▷그밖에 지원단의 목표달성을 위해 필요한 활동을 주요 기능으로 삼고 있다.
‘주민참여예산 지원단’은 주민참여예산제의 최고 의결기구인 ‘주민참여예산위원회’의 기능을 돕는 역할을 한다. 천안시 주민참여예산조례 제23조에는 ‘시의회의원, 예산관련전문가, 관련분야 종사자, 비영리민간단체관계자, 관련 공무원 등 10명 이내로 구성한다’라는 조항이 명시돼 있다.
시는 29개 민간단체 중 ▷천안시사회복지협의회 ▷천안아산환경운동연합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 천안지회 ▷천안아산경제정의실천시민운동연합 4개 단체의 대표들을 지원단 구성원으로 선임했다.
‘주민참여예산지원단’의 대표성과 위상을 상당히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또 정책자문교수단 68명중 자치행정분과의 교수 2명을 지원단 명단에 포함시켰다. 여기에 공무원 2명으로는 김대응 기획예산과장과 박재현 예산팀장이 참여 예정이고, 시의원은 애초 2명이 언급됐으나 현재 협의가 덜 끝나 공표가 미뤄진 상태다.
천안시 박래헌 예산팀장은 “민간단체 대표들은 여러 단체 대표자 중 시장님이 균형적으로 선발했고 시의원들은 시의회 의장님의 추천을 받아 선임할 계획이다. 특히 시민사회단체 대표의 선정은 그 비율과 균형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천안시도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는 만큼 조기정착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경리직원 뽑자는데 CEO를 영입하다니…’
하지만 시의 이런 운영계획을 두고 조례제정 당시 시의회 조례안측에 섰던 시의원들과 시민단체의 의견은 전혀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다.
2005년 조직돼 현재 15개 사회복지기관, 시설, 단체가 참여해 활동하고 있는 ‘참여예산복지네트워크’에서 천안시의 예산분석을 담당했던 이상희씨는 “주민참여예산 지원단은 말 그대로 지원을 담당할 실무자 위주로 구성돼야 한다. 하지만 지원단에 참여하게 된 4개 단체는 그 성격을 떠나 실무자가 아닌 대표자님들로 구성돼 있다. 모두 훌륭한 분들이시지만 그동안 주민참여예산제와 관련해 직접 연구하고 분석했던 실무급 인사들이 모두 제외되고 형식적인 모양새만 갖추는데 초점을 맞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인 든다”고 말했다.
천안시 주민참여예산제 운영조례안을 대표발의했던 전종한 시의원은 “지원단의 역할은 말 그대로 최고 의결기구를 지원하는 실무적이고 구체적인 역할이다. 회사 경리부서에서 일할 직원을 뽑는 데 엑셀 잘하고 워드 잘 치는 직원을 뽑은 게 아니라 CEO를 모셔온 것 같다”고 평가했다.
천안아산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정병인 사무국장은 “지원단에 위촉된 대표님과도 상의했지만 주민참여예산지원단은 주민참여예산제의 최상위 조직이 아니다. 시에도 과거 조례제정추진단에서 함께했던 실무그룹에서 활동했던 인사들이 지원단에 들어가는게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고 밝혔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천안시가 주민참여예산지원단을 두고, 마치 다른 실과의 유명무실한 위원회 수준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원단 구성은 행정부만 고민할 내용이 아니다. 예산편성 주도권에 대해 여전히 집착하는 천안시의 낮은 인식이 그대로 드러난 것 같다”고 평했다.
이런 우려에 대해 천안시 예산팀 박재현 팀장은 “과거 조례제정 추진단은 ‘어떻게 조례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함께 했던 그룹이다. 이 과정을 통해 조례라는 ‘옥동자’가 태어났고 그 역할은 거기서 끝난 것이다. 지난 그 과정에서 지혜를 냈다고 끝까지 참여하겠다고 하는 것은 본래의 취지나 그들의 순수성에도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박 팀장은 “천안에는 200여 개 시민단체가 있다. 그중 4개 단체를 선정했고 과거 조례제정 추진단에 참여했던 단체도 2개나 들어있다. 기존에 나름의 역할을 했는데 우대를 안하고 배려를 안 해 줬다고 시가 잘못됐다고 주장하긴 힘든 것 아닌가. 공정성에는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시민들과 시민단체에 대한 신뢰 문제
시민단체 측은 ‘주민참여예산제가 처음이다 보니 쉽지 않겠지만 협의하고 진행하는 과정 자체가 의미 있는 작업이다. 작은 성과라도 거두고 참여자들이 그것을 느끼게 된다면 더욱 성장할 수 있다’며 과정과 경험을 중요시하는 입장이다.
이에 반해 천안시 측은 ‘주민참여예산위원회가 불완전한 정보에 의해 정책을 결정할 경우 매우 큰 위험성을 내포할 수 있고, 민감한 사안의 경우 주민갈등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며 성과와 위험성을 걱정하는 입장이다.
복지세상을 열어가는 시민모임 진경아 사무국장은 “주민참여예산제는 주민들이 편성하는 예산의 폭이나 규모보다 그 과정자체가 중요한 작업이다. 자기 마을의 사업에 스스로 즐기면서 참여하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
진 사무국장은 “주민참여예산제의 세계적 모범사례인 브라질 뽀르뚜알레그리 시가 지금의 주민참여예산제를 갖게 되는 데는 10년 이상이 걸렸다. 첫술에 배부르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하면 안 된다. 하지만 제도의 도입 취지 자체에 대한 의심은 없어야 한다. 행정부도 혼자만 고민하고 혼자만 할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을 바꾸고 시민사회와 외부 의견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반해 천안시청 박재현 예산팀장은 “최고의결기구인 주민참여예산위원회가 여론을 여과하고 조정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할 수 있다. 특히 혐오시설이나 편의시설을 서로 피하거나 원하다 보면 주민갈등이 야기될 가능성도 무척 높다. 더구나 천안은 도농간 지역간 갈등요인도 많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박 팀장은 “주민참여예산제에 대한 한계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천안시예산팀 7명의 직원들은 1년내내 1400여 페이지가 넘는 예산안을 분석하고 조정하고 조정당한다. 이에 반해 주민참여예산제는 사실 비전문가 다수가 모여 단기간에 예산 정책을 결정하는 것 아닌가. 위험성도 상당히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주민참여예산제, 잘만 운영한다면…
천안시 주민참여예산제의 제도적인 완성도는 천안시를 비롯해 모든 구성원들이 높게 평가하고 있다. 실무지원단을 조례로 제도화해 놓은 곳은 천안이 최초였고 그 내용들도 타 지역보다 무척이나 선진화한 내용이다.
박재현 예산팀장은 “주민참여예산제의 최고의결기구인 주민참여예산위원회는 전국 어느 곳보다 개방적이다. 100명중 읍면동 28명, 공무원 6~7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희망하는 사람들에 대한 무작위 추첨방식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실 주민참여예산지원단에 누가 들어오고 안 들어오고 하는 것이 제도 근간을 흔들만큼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행정부가 큰 길을 열어 놓으면 그 안에서 다양한 의견들이 오가고 방향성도 잘 정리될 것이다.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잘 만든 제도인만큼 조례에 담긴 내용과 의미를 구현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복지세상을 열어가는 시민모임의 진경아 사무국장은 “솔직히 이번 조치를 보면서 시가 너무 방어적으로 형식적으로 운영하려 하진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된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그랬듯 주민참여예산제는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어려움이 있다고 안할 수는 없는 의제가 됐다. 현재 의무재정공시제도가 있지만 임의공시 항목을 확대하고 시가 시민들에게 더 많은 자료를 공개, 공유하고 주민 참여의 폭을 넓힐 때 분식회계라고 지적받던 천안시 예산의 투명성도 더욱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도보다 사람이 답이다’
주민참여예산제는 사실 제도 자체보다 그것을 운영하려는 주체들의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지속적으로 강조돼 왔다.
앞서 언급됐던 브라질의 뽀르뚜알레그리시는 사실상 구체화된 조례를 갖고 있지도 않다.
의견이 다르다고 헤게모니를 빼앗을 경쟁자로 인식하고 파트너십을 버린채 독자행동을 거듭한다면 아무리 그것이 성과가 좋다하더라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 힘들다.
천안아산경실련 정병인 사무국장은 “주민참여예산제는 결코 시 혼자만, 또는 시민단체만 추진해서 성공할 수 있는 제도가 아니다.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서로를 파트너로 인정하고 제대로 된 민관협치를 구축해야 제도의 취지를 구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진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