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오전, 재판이 허무하게 연기된 직후 학부모들과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추후 대책을 논하고 있다.
천안판 ‘도가니’ 사건, 1차 공판 연기
지적 장애학생을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특수학교 교사 A씨(49)에 대한 1차 공판이 오는 29일로 연기됐다.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 제1형사부(재판장 최성진)는 지난 1일(수) 제3호 법정에서 열린 공판에서 “A씨가 국선변호사를 신청하지도 않고, 사선변호사도 선임하지 않아 재판을 진행할 수 없다”며 1차 공판 연기를 결정했다.
현행법에 따르면 구속피고인은 변호사가 있어야만 재판이 가능하도록 정하고 있다.
법원은 오는 27일 정기인사를 앞두고 있는데다 이에 앞서 22일부터 업무정리에 들어갈 예정이다. 사실상 재판부가 선고공판까지 이어가기 어려운 상황. 담당판사는 “새 재판부가 관련 사건을 다시 조사해 재판을 진행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며 공판연기에 대한 방청객들의 이해를 구했다.
천안에 있는 공립 특수학교에서 교사가 장애인 학생을 성폭행 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검찰과 경찰이 나선 것은 지난 11월. 이후 추가피해자들이 잇따라 발굴되며 이번 사건은 천안판 ‘도가니’ 사건으로 비화되고 있다.
학부모들 “추가피해 밝히고 책임자 처벌 확대할 것”
교장 ‘보고받은 바 없다’, 교감 ‘명예퇴직 신청’
“죄가 없다면 변호사를 빨리 선임해 재판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지 왜 그냥 나왔나?”,
“의도적으로 재판을 연기하고자 하는 것이냐”
“피해자, 가족들, 관련 학부모들을 더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재판부는 피고가 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한 걸 알면서 왜 오늘을 재판일로 정한 것인가”
지난 8일(수) 오전 10시30분, 천안지원 제3호 법정.
이날 법정 방청석은 피해자 학부모를 비롯한 이 학교 학부모들, 시민단체 관계자들, 언론사 기자들 등으로 모든 자리가 다 채워졌다.
피고인석에 선 A씨는, 이전 변호사가 사임해 새로운 사선 변호인을 구해 재판에 참여하려 했지만 이날 공판일까지 새로운 변호사를 구하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방청석 이곳저곳에서는 술렁거림과 함께 많은 불만들이 터져 나왔다.
담당판사는 “재판이 늦어져 개인적으로는 미안하게 생각한다. 많은 분들의 감정을 감안해 여러 발언들을 제지하지는 않았지만 법원에서는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주길 바란다”며 방청석을 진정시켰다.
이어 “이 사건은 사안 자체가 무척 중대하고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사안이다. 법원일정상 8일과 15일 재판이 가능한데 증인심문, 증거조사 시간이 충분치 않다. 신속한 재판도 중요하지만 신중한 재판이 더 중요하다”며 관계자들의 이해를 구했다.
영화 ‘도가니’, 천안에서도 유사한 일이?
지난해 개봉한 영화 ‘도가니’는 광주 인화학교에서 벌어진 교직원들의 장애학생 성폭행 사건이라는 실화를 소재로 제작돼 사회 전체에 엄청난 파급을 불러왔다.
천안의 한 공립특수학교에서 교사에 의한 학생의 성폭력 피해가 불거진 것은 바로 이 영화 ‘도가니’를 통해 장애인 성폭력에 피해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급속하게 뜨거워졌던 지난해 10월말이다.
보건복지부는 영화 ‘도가니’로 여론이 비등해지자 지난해 9월29일 장애인 시설중 인권침해 우려가 높은 미신고 시설 10곳을 비롯해 개인운영시설 109곳에 대한 운영실태 조사계획을 밝혔다. 이에 앞서 교육과학기술부는 9월28일 기숙사가 설치된 전국 41개 특수학교를 점검하겠다고 발표했다.
사건이 불거진 천안의 ‘ㅇ’ 특수학교는 유치부에서 고등부, 전공과 학생까지 지적·발달학생 등 총 240여 명이 재학 중이며, 남녀학생 10여 명이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다.
교육청과 장애인부모회, 천안장애인성폭력상담소는 지난 10월 말 이 학교를 방문 상담했다.
이들은 이 과정에서 B학생(19·지적장애1급)으로부터 교사에게 2년간 성폭행과 성추행을 당해왔다는 진술을 받게 됐다.
B양은 지난 2009년부터 최근까지 A교사로부터 기숙사와 직업교육실 등에서 수차례 성폭행과 성추행을 당했다고 진술했다.
이 진술을 확보한 교육당국은 충남지방경찰청에 사건을 통보했고 충남지방경찰청은 대전지검 천안지청의 지휘를 받아 여경들로 구성된 원스톱 지원센터에서 약 1주일간 B양에 대한 피해자 조사를 실시하면서 조사장면을 동영상으로 녹화했다.
경찰조사에서 B양은 “A교사가 담임선생님과 다른 선생님에게 말하면 죽인다고 협박해 성폭행 당한 사실을 그동안 남에게 숨겨왔다”고 진술한 걸로 알려졌다.
도움요청 묵살되고, 상부 보고도 안돼
경찰은 지난 12월16일 공립 특수학교에서 지적장애 학생을 성추행한 혐의(성폭력특별법 중 장애인준강간)로 A교사를 구속했다. 대전지법 천안지원은 이날 영장실질심사 과정에서 “도주의 우려가 있다”며 영장을 발부해 줬다.
피해자 B양은 지적장애 정도가 심해 성폭행에 대해서는 정확한 진술을 하지 못하고 있어 A씨는 장애인준강간 혐의를 받고 있다.
하지만 이날 법정에서 조차도 피고인 A교사는 해당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경찰은 이후 김양 이외의 다른 여학생도 교사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진술을 확보, 수사를 확대했다. 현재 학부모단체와 시민단체들은 K양을 포함해 5명의 피해학생을 발견한 상태고 표현하지 못해 밝혀지지 않은 다수의 피해자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건은 이렇게 크고 심각했지만 정작 학교는 1년 가까이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은폐·축소하고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돼 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B양은 지난 2010년 10월 이미 자신이 성폭행 당했다는 사실을 학교 생활지도 교사들에게 알렸었고 사감 및 일부 교사들은 이를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됐다.
B양은 2010년 가을부터 기숙사 사감 등에게 자신의 성폭력 피해 사실을 알렸지만, 의사전달이 불확실한 지적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묵살됐다. 사감교사는 B양으로부터 ‘A교사가 저 만져요’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문제의 교사가 다정하게 잘해주기 때문으로 알았다”고 말했다.
교감 역시 “B양이 생활지도원과 1대 1 면담을 할 때 성폭력 피해에 대해 얘기를 한 적이 있다”며 “B양이 너무 리얼하게 얘기했다고만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교장은 “부하 교사들이 별 문제가 아니라고 자체 판단한 듯하다. 전혀 보고를 받지 못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건초반, 이 학교 일부교사와 교감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가해피의자 A교사에 대한 구명 탄원까지 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논란이 가중되고 있는 가운데 교감은 ‘명예퇴직’을 신청한 상태로 학부모들을 더 분노케 하고 있다.
장기화 될 재판, 책임질 사람 책임지도록…
재판이 허무하게 연기된 직후 이 학교에 학생들을 보내고 있는 학부모들과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법원 구내식당에 모여 추후 대책을 논의했다.
학부모들은 재판이 장기화 될 것을 우려하며 지속적으로 힘을 모아나갈 것을 다짐했다.
한 학부모는 “전국 실태조사결과 타 지역포함 장애학생 성폭력·성추행 19건이 추가로 밝혀졌다. 타 지역에서는 외부에 도움을 청하기도 문제 해결의 단초를 찾기도 어려워 가슴앓이만 하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우리가 그들에게 힘이 되는 결과를 이끌어 내야 한다”고 말했다.
학부모들은 교육청이 고발한 가해교사 A씨 외에 교감 등에 대해서도 고소에 나설 예정이다. 학교는 학생들에 대한 기본적인 보호의 의무를 다 해야 하고, 학생들에 의해 제보가 접수되면 유·무죄를 떠나 기본적으로 상급자, 상급기관에게 보고하도록 규정돼 있다. 자의적 해석을 통해 문제를 축소하려한 책임을 지게 하겠다는 것이다.
한 학부모는 “교장, 교감, 담임, 부담임 모두 고소해야 한다. 이를 위한 대책마련과 부모들의 단합된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시민단체와 학부모로 구성된 대책위는 ▶전학생과 퇴학생, 졸업생 등에 대한 추가조사 ▶‘ㅇ’특수학교에 대한 감사청구 ▶피해자와 그 가족에 대한 심리 치료비 등 민사소송 ▶초중고 성폭력 전수조사 ▶학교 기숙사 거실과 현관등에 CCTV설치 등을 추가 과제로 제시했다.
이들은 앞으로 ▷인권교육과 인성교육 강화협력 ▷반의사불벌죄 폐지운동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 등도 함께 펼쳐나갈 계획이다.
<이진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