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 교수 (단국대 의과대학 교수, 충남시사신문 논설위원, 딴지일보 기자,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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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바뀐다고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는 건, 나이가 어느 정도 든 사람이면 다들 아는 사실일 게다. 담배를 끊겠다거나 논문을 많이 쓰겠다 같은 개인적인 결심이야 노력 여하에 따라 이루어질 수도 있겠지만, '조국통일'처럼 자기 힘이 닿지 않는 일을 소원이랍시고 빈다면 너무 순진한 게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내가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건, 올해 목표를 '조금 순진해지기'로 정한 탓이다. "그래봤자 되겠어?"라는 체념적인 태도보다는 뭔가 기대를 갖고 사는 게 좀 더 좋아 보이니까. 올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새해 소망을 몇 가지만 적어본다.
첫째. 대통령의 진솔한 모습이 보고 싶다
대통령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분으로, 막강한 권한을 갖는다. 물론 그 권한만큼의 책임도 따르는지라 일반인 같으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단지 대통령이기 때문에 비난을 받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현 대통령은 지난 4년간 자신의 권한을 충분히 즐긴 것 같다. 강바닥도 원없이 팠고, 고향 선후배와 같은 교회 신자들을 요직에 등용했다. 그런데 그만큼의 책임을 졌느냐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아랫사람 탓을 했고, '오해' 운운하며 국민들이 자신의 말을 잘못 이해한 걸로 몰고 갔다. 내곡동 파문이 났을 때 했던 "본의 아니게....유감이다"란 발언은 그 절정이었다. 너무 사과를 많이 하면 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높은 자리에 있는 분이 가끔씩이나마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사과한다면 멋지지 않겠는가? 올해는 남 탓보다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는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
둘째, 야당의 존재감이 있었으면 좋겠다
정치가 잘 되려면 제대로 된 야당이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지난 4년간 정치의 난맥상은 민주당 탓도 크다. 잘한 게 없어서 정권을 빼앗겼다면 다시 찾아오려고 절치부심해야 하건만, 어떻게 된 게 하는 일이 없다. 10월의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그 절정으로, 자기 당의 후보를 내서 이길 생각을 하기보단 멀쩡히 잘 있는 안철수만 바라보고 있었고, 무소속으로 나온 박원순의 승리가 자신의 승리인 양 환호하는 모습은 보기가 딱할 정도였다. 나라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칠 한미 FTA 체결을 방관하다시피 한 건, 대체 야당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헷갈리게 만들었다. 현 정권이 워낙 일을 많이 벌였으니 야당이 조금만 노력해도 국민의 사랑을 받을 텐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올해는 총선과 대선이 있는 해이니만큼 지난 4년의 안좋은 기억은 잊고 존재감을 보여줬으면 한다.
셋째, 검찰이 권력의 시녀 노릇을 그만했으면 한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검사와의 대화'를 보며 잔잔한 감동을 받았다. 검사들이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간절히 원한다는 걸 알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현 정권이 들어선 이후 검사는 다시 시녀 자리로 돌아갔다. 사문화된 전기통신법을 가져다가 미네르바를 구속한 일, 피의사실 공표가 뭔지 보여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일, 한명숙 전 총리를 무리하게 기소해 두 번이나 무죄 판결을 받게 한 일 등등은 훗날 검사의 오점으로 남을 부끄러운 기억들이다. 올해는 임기 마지막 해라 대통령의 힘이 약간은 빠질 시기니만큼 뭔가를 좀 보여줬으면 한다. 현재 선관위 홈페이지 디도스 공격이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데, 그 배후를 알아내는 게 검찰의 첫 번째 과제다.
넷째, 언론이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갔으면 한다
정치를 야당과 여당이 싸우는 축구 경기에 비유한다면, 언론은 심판에 비유될 만하다. 심판이 편파적인 경우 축구 경기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것처럼, 그간 우리 정치판의 난맥상은 심판을 맡아야 할 언론이 자기 역할을 방기한 탓이기도 하다. 소위 '대통령 만들기'처럼 몇몇 보수언론들은 단순히 편파판정에 그치지 않고 직접 경기에 뛰어들기까지 했는데, 그런 모습은 현 정권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그 결과 그네들은 '종편'이라는 달콤한 선물을 받아 챙겼지만, 그 과정에서 국민들의 신뢰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꼼수다'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는건 제대로 된 언론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올해는 조중동을 비롯한 언론들이 당파적 보도를 일삼기보단 최소한 사실은 보도하면서 자기 색깔을 드러내길 빈다. 디도스 공격같은 큰 사건을 눈에 안띄게 축소하는 건 해도 너무했다.
다섯째, 남북관계가 개선됐으면 좋겠다
남북관계는 참 어려운 과제다. 경제력도 차이가 날뿐더러 이해관계도 다르니, 남북관계를 풀어나가는 데 정답은 없다. 아쉽게도 현 정부 들어 남북관계는 그다지 좋지 못했고, 천안함 사건이나 연평도 포격 등 자칫하면 전쟁으로 갈 수 있는 사건들이 종종 벌어졌다. 그런 일련의 사건들에 책임이 있는 김정일이 사망하고 김정은이 권력을 승계받았다. 그간 좋지 않았던 남북관계에 전기가 마련될 기회이건만, 현 정부는 조문에 적극적이지 않아 관계개선의 기회를 놓쳤던 1994년의 전례를 답습하고 만 듯해 안타깝다. 올해라도 그간 쌓였던 응어리를 풀고 남과 북이 대화의 물꼬를 텄으면 한다.
이상의 소원들 중 두세 가지만 이루어진다면, 2012년은 정말 희망찬 한 해가 될 것 같다. 소원 한 가지 한 가지가 다 만만치 않게 어렵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