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종연 회장.
10년째 신방동 한라아파트 앞에서 빵집을 운영하고 있는 원종연 씨. 35년간 제빵기술자로 일해 온 원씨는 6·25참전유공자녀회 천안지회장을 맡고 있다.
원씨의 부친인 고 원재규 씨는 6·25당시 수사1연대 소속으로 평양전투에 나섰던 참전용사다. 당시 상사계급으로 통신병과를 맡았던 고 원재규 씨는 안타깝게도 전투 중에 목뒤에 폭탄 파편을 맞는 중상을 당했다. 당시 간이막사에서 간단한 치료만 받은 원씨는 부상 직후부터 마지막까지 갖은 고생을 감내해야 했다고 한다.
“병원에 입원하려 해도 환자들이 밀려있다보니 여기저기 다니면서 간간이 치료를 받으신 정도였죠. 아예 후방에서 참전하셨으면 병원치료 기록이 명확히 남았을 텐데 최일선 전선에서는 그런 기록조차 남길 수 없었던 거죠. 돌아가시는 날까지 안타까운 마음만 간직했었는데 나중에서야 ‘보통상이기장’이라는 증서를 발견했어요. 전투중에 다치셨다는 증거 서류였는데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에서야 머리맡에 남겨두셨죠.”
원씨는 지금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메인다.
이후 어떻게든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보훈청을 찾아가 봤지만 상이기장증은 인정이 안 된다는 대답을 들어야 했다. 상이 인증을 받기 위해서는 전투에 참여한 2인 이상의 인후보증을 받아야 한다는 것.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51년 화랑무공훈장을 받고, 93년 국가유공자증, 98년 참전용사증서를 받았지만 아버지는 전쟁당시 입은 뇌손상으로 밤에는 제대로 주무시지도 못하고 식은땀에 범벅이 되시거나 소리를 지르는 등 정신적 외상도 감내해야 했다. 진통제를 상시 복용하셨던 아버지는 나중에는 앞을 거의 보지 못하게 되셨고 원인도 불분명한 합병증으로 결국 세상을 떠나셨다.
“6·25의 의미와 참 뜻을 요즘 사람들은 너무 몰라요. 국회조차도 그렇다니까요. 당시 아버님들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편하게 사는데…. 나라의 소중함, 부모의 소중함을 알아야 국가기강이 바로서고 역사가 바로잡히는 것 아니겠어요?”
“또 전시 유공자와 평시체제하의 공무원과 군경의 공상은 국가 유공자와 분리된 별도의 제도로 보상을 해야만 진정한 국가 유공자로서의 예우와 국민들로부터 존경이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여기에 앞서 가짜, 사이비 국가 유공자를 철저히 가려내고 부정부패한 자는 엄벌하는 엄중한 법률이 우선적으로 제정됐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들의 희생과 전쟁의 의미를 바로 알리고 싶은 원종연 씨의 바람은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더 간절하다.
<이진희 기자>
원종연 회장의 부친, 고 원재규씨의 유품
고 원재규 씨.
원종현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