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2010 경인년이 저물고 2011년 신묘년이 다가오고 있다.
천안교차로·충남시사신문이 충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함께 이웃사랑 캠페인을 추진해 온 것도 벌써 만 6년째를 맞고 있다.
12월 현재, 희망2009 1004캠페인에 동참하고 있는 천안·아산 시민들은 참여자수 기준으로 1000명에 가깝고, 성금은 월 평균 180여 만원이 넘는다. 지금껏 본보를 통해 소개된 사례는 80건에 달하고, 누적 성금은 지난 11월30일 보도된 문현자씨에 대한 지원이 마무리 되면 1억2000만원을 돌파할 예정이다.
올해 역시 본보는 천안·아산에 살고 있는 희귀·난치병 환자, 모자가정, 극빈가정 등 어려운 환경에서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이들을 발굴·보도했고 작지만 소중한 울림을 이끌어냈다.
지원을 받은 10가정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본보는 올 한 해를 돌아보며 이들의 근황을 전하고 그동안 성금모금에 참여해준 후원자들과 본 지면을 아껴준 독자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한다.
천안교차로·충남시사신문은 다가오는 2011년에도 지역사회 기부나눔 문화의 모범이 된다는 각오로 지역의 어려운 이웃들을 찾아가고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데 주저하지 않을 예정이다.
<이진희 기자>
17년간 외아들 키워온 여성가장 이창순(48) 씨
엄마를 일으킨 아들, 그런 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자립하려는 엄마.
이창순 씨의 목소리는 한결 힘이 실린 듯 했다.
지난 2월에 본보의 지원을 받은 그녀는, 92년 결혼 5개월만에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된 후 독립의 길을 택한 뒤 본인의 인생을 개척하고 있는 여성가장이다.
지난 17년 동안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아들과 함께 세파를 견디는 모습으로 감동을 전해준 그녀는, 지난 4월 성환 시장길에서 지인과 함께 조그만 식당을 열었다고 한다.
보건복지부 희망프로그램에 사업계획서를 내 지원대상으로 선정된 뒤 후원 받은 돈으로 창업까지 성공한 그녀는 한발한발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식당 매출은 지역경제가 어려운 것에 비하면 그나마 괜찮은 편이라고.
점심장사를 마치면 저녁때는 집에 돌아와 메주를 만들고 장에 대한 연구를 한다. 당시 보도됐던 것처럼 그녀의 마지막 꿈은 ‘장(醬)과 관련한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는 것이다.
“성환배를 이용한 된장, 고추장을 만들고 또 그것들을 이용한 장아찌 등 반찬도 연구중이에요. 내년부터는 바자회에도 참여하고 후원사업도 참여할 작정입니다.”
아들에게 떳떳하고 믿음을 줄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싶다는 그녀의 바람은 이제 더욱더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28살 미혼모인 그녀의 삶은… 박정은(28) 씨
박정은 씨와 오랜만에 전화통화를 한 것은 밤 9시30분이 넘어서였다. 8시 반이 조금 못 되서 집에서 나와 일을 시작했다니 12시간 가까이 일을 한 날이었다.
예전에 비해 근무여건은 좀 나아졌다고 하지만 그녀의 삶은 여전히 쉽지 않아보였다.
이제 만 28살. 요즘에는 노처녀라고 조차 할 수 없는 나이지만 그녀는 엄마와 딸을 부양하는 미혼모자가장이다.
중학시절 말못할 상처를 입은 뒤로 그녀는 모진 세파에 휘둘리며 살아왔다. 야간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방직공장, 대학교 사무실 등에서도 일을 하다가 38살이나 된 남자와 본의 아닌 동거를 하면서 몸도 마음도 다치고 돈도 거의 강탈당하다시피 했다. 결국 그의 해코지를 피해 도망오게 됐다는 천안.
그녀는 한 남자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게 되면서 미혼모이자 여성가장이 됐다.
지난 1월, 19개월인 딸을 두고 한 공장에 들어간 그녀는 시급 3500원에 9시간 노동을 시작했다. 일이 끝나면 대리운전 안내원으로 투잡을 하던 그녀가 평일에 아이를 볼 수 있는 시간은 단 2시간에 불과했다.
그 공장을 그만둔 뒤에는 탕정의 큰 사업장에 들어가 공사현장 감시일을 했고 5개월 정도 전부터는 지금 다니는 자동차 부품 공장을 다니고 있다고.
인터뷰 당시 월세방 보증금 500만원, 의료보험료 약 80만원, 핸드폰 미납요금이 100만원 가량이나 빚이라던 그녀는 아직 그 짐을 다 덜지 못했다.
안타까움 속에 기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행운을 빌어주는 일 뿐이었다.
철거예정인 집에서 두 자녀와 불안해하던 강연주(38) 씨
“10월경에 연락이 왔었는데요, 보상문제로 토지매입이 늦어지면서 계획됐던 소방도로 개통이 좀 연기됐데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어떻게 해야할지, 불안한 건 어쩔 수 없네요.”
지난 3월, 살고 있던 집을 관통하는 도로가 생긴다며 서둘러 이사를 가라는 말을 들은 강연주씨는 불안하기만 했다.
남편이 없는 상황에서 폐렴에 걸린 둘째, 젖먹이 건이를 놔두고 일을 나갈 수도 새로운 집을 구할수도 없는 형편인데다 수중에 돈이라고는 남아있지 않은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녀에게 지원되는 것은 차상위 계층이어서 받는 여진이의 유치원비와 5만원의 지원금이 전부다.
차상위 계층의 경우, 보통 자활근로를 통해 생활을 이어갈 수 있지만 아이가 둘이다보니 무엇을 시작하기가 어렵다.
어려운 상황속에서 그나마 얼마 전에는 성정종합사회복지관에서 연탄 300장을 후원해 주어 한숨을 돌렸다고.
하지만 언제 이사를 가야할 지를 모르는 상황이어서 본보에서 받은 지원금 중 100만원은 아직 통장에 두고 쓰지를 못하는 상황이다.
“건이가 조금만 커서 어디에 맡겨 놓고 잠시나마 아르바이트라도 할 수 있다면 훨씬 나을 거에요. 1~2년 정도의 시간만 있다면 저 혼자 일어날 수 있는데…. 그게 쉽지가 않아요”라며 안타까워 하던 그녀에게 이번 겨울은 정말 불안한 계절이다.
무너진 몸과 마음, 추스를 겨를도 없던 싱글맘 이서현(42) 씨
결혼과 출산이후 행복과는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던 그녀.
무관심하고 무능력했던 폭력남편에게서 독립한 이서현씨는 책임감과 위기감에 일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오후까지는 파출부로 두 집을 뛰었다. 이후 저녁 6시반, 7시쯤 집에 잠깐 들어와 아이들을 챙기고는 바로 저녁8시반에 나가 다음날 까지 밤샘영업을 하는 해장국집과 레스토랑으로 일을 나갔다. 하루 20시간에 가까운 노동.
2년여 정도 그런 무리한 생활을 하면서 서현씨의 몸은 차츰차츰 고장이 나기 시작했다.
혈관수술, 자궁근종, 알츠하이머 의심증상 등을 보이던 그녀는 대인기피 증세마저 보이다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기도 했다.
지금도 우울증약을 복용하는 중이라는 그녀의 상황은 별로 나아진 것이 없었다.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 나오던 기초수급비도 이달부터 30만원이 넘게 깎였다는 것이다. 통원을 하려고 조카의 중고차를 가져다 잠시 쓰고 있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읍사무소에서는 바로 지원액의 감소를 알려왔다.
400만원 가까이 되던 관리비 체납액은 조금씩 갚아나가고 있지만 매월 다시 부과되다보니 이제 겨우 100여 만원이 줄어든 상태다.
그나마 희망을 이어가게 하는 건 두 자녀들. 공부도 잘하지만 의지도 남다른 아이들을 보며 다시 힘을 내본다고.
복지사각지대서 남매키우던 싱글맘 이현정(31) 씨
22살에 홀어머니의 외아들이었던 남편과 결혼했던 현정씨.
시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애정은 정상적인 수준을 훨씬 넘어선,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것이었다.
1박2일 설악산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그녀는 집에 돌아온 후 침실에 깔려있던 이불 3채를 보고 나서야 의심스러웠던 주위의 소문과 걱정이 기우가 아님을 알게 됐다.
그녀가 해 준 음식을 보는 앞에서 쓰레기통에 버리기도 하고, 애를 낳지 말고 나가서 돈을 벌어 오라고 채근하기 일쑤였다. 애를 가지면 남편도 정신을 차리겠지 기대했지만 여전히 남편은 술과 도박을 즐겼고 엄마와 친구가 가정보다 우선이었던 사람이었다.
친정에서 할머니가 두 분이었고 그 관계가 너무 싫었던 이현정씨는 그래도 이혼만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 참는 데까지 참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뱃속 아이를 지우라며 산부인과로 현정씨를 데려다 주던 시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하면 아직도 눈물이 난다고.
이혼 후, 2007년 둘째 준서의 아빠를 만났지만 증권회사에 다니던 동생이 친정과 새 남편의 재산까지 모두 주식에 투자했다가 그만 모두 날리게 되면서 아픔은 끝날 줄 몰랐다.
현정씨는 다행히 천안시건강가정지원센터의 도움으로 전세보증금 소액대출을 받았다. 또 기초생활수급대상자로 선정돼 얼마간의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매월 집세 35만원, 대출금의 원금과 이자 15만원, 수도·전기 등 각종 공과금을 내고 나면 10만원 가량으로 두 아이를 양육해야 하는 상황이다
“1~2년 정도 둘째 준서만 어디에 맡길 정도만 되도 무슨 일이라도 해서 자립하고 싶다”고 말하는 그녀. 현재는 집에서 전선의 피복을 까는 부업을 하며 ㎏당 작은 수당을 벌고 있다.
다행히 한 기독교 재단에서 병원비 정도는 지원해주고 있는 형편이라고.
희망의 새싹, 여섯자매 키우던 박지연(33) 씨
“아이들이 욕심이 없어서 다행이죠. 남들처럼 똑같이 해달라고, 사달라고 투정부리지 않는 것만도 너무 고마워요.”
어려운 여건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있던 여섯 자매의 엄마 박지연(34)씨.
성거읍 오목리의 오래 된 슬레이트 집. 시골에 오래 전 지어진 탓에 여기저기 불안해 보이는 이 집에는 딸만 여섯을 자녀로 둔 박지연씨와 남편 임씨가 살고 있었다.
그리 넓지 않는 집이지만 그곳에는 이들 외에도 세 가정이 공동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많은 데다 오래된 집이다 보니 겨울이면 난방비가 월 70만원이상 들어간다던 그 집에 얼마 전부터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최근, 어린이재단에서 공부방 지원사업으로 완벽하게 집수리를 해 준 것이다. 화장실과 주방을 빼곤 방의 도배, 장판, 가구 등 많은 부분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아이들은 이제 친구들을 데려와 자랑을 하는 게 일이다.
마사회 천안지점에서는 난방비를 도와줬고, 건강가정센터에서는 쌀과 이불 등을 보태줬다. 큰 딸 은비는 앞으로 20개월 동안 매월 15만원씩 장학지원을 받게 됐다고.
건강하지 못했던 막내 은혜도 돌이 지나면서 괜찮아져 기쁜 일이 많아졌다는 그녀.
남편도 중국집 배달과 대리운전의 투잡을 하면서 아이들을 뒷바라지 하느라 열심이다.
“저…, 뱃속에 일곱째가 생겼데요. 4주 남짓 지나 좀 조심스럽기는 하지만요”라며 기쁜 소식을 전하는 그녀에게 올해는 희망의 싹을 틔운 해로 기억될 듯 하다.
딸 아이와 함께 학교에 가보는 것이 소원이라던 현성숙(54) 씨
배방읍 공수리에 사는 현성숙 씨는 어려운 여건에서 하루 12시간일을 하는 고된 일상을 보내다 큰 교통사고를 당해 안타까움을 자아냈던 어머니였다.
뺑소니 사고로 오른다리를 뺀 나머지 사지는 뼈가 부서졌고 갈비뼈가 부서지고 방광도 터져서 사실 사고 당시에는 살아나는 것도 어렵다고 볼 만큼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특히 왼쪽 골반과 대퇴부는 자칫 절단해야 할지도 모를 만큼 심각한 상태였고 의식도 2008년 말까지 온전하게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큰 수술을 15번이나 받았고 아직도 수술을 해야 하지만 왼쪽 다리 골수에서 염증이 발생해 염증을 치료하며 수술을 미루던 현성숙씨는 최근 봉합은 못했어도 염증은 많이 줄어 좀 나아진 상태라고 한다.
다만 전동휠체어를 신청했었는데 무슨 착오가 있었는지 수동휠체어를 지원받아 사용중인 것과 차상위 지원이 취소돼 병원에 갔을 때 치료비가 더 많이 나오게 된 것이 걱정이라고.
“요즈음 다른 바람은 없어요. 우리 딸과 남편이 건강하게 사는 것 밖에는… 만약 몸이 나아서 움직일 수 있게 된다면 딸과 함께 학교에 가는 것이 소원입니다. 학부모 행사 때 참석하지 못하니까 아이가 많이 서운해 하더라고요.”
누군지 마음이 편치 않을 거라며 오히려 범인을 걱정하던 현씨의 긍정적인 마음과 가족사랑은 이 가족에게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게 한다.
아들의 첫 돌, 세상에 새 출발을 알렸던 김희경(가명·28) 씨
대부분의 미혼모들은 스스로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불필요하고 과도한 사람들의 관심과 편견을 이기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본보를 통해 소개되기까지 희경씨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숨어서, 사람들을 속여가며 살아갈 수는 없었다. 하율이를 생각해서라도 말이다.
그녀에게 하율이 아빠는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처음 임신소식을 알렸을 때도, 기뻐하며 아이를 낳자고 했다. 병원에도 같이 갔었고 임신 5개월이 되도록 함께 살았다.
하지만 빚과 개인적인 문제로 정상적으로 취업을 통해 돈을 벌 수 없었던 그는 서울로 가서 돈을 벌어 부쳐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바람과는 달리 그런 약속은 오래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연락의 빈도도 낮아지고 일주일에 한번씩 내려 온다던 다짐도, 송금의 빈도도 점점 줄어갔다. 결국 끊기고 만 연락.
아버지를 속이고 친정에 돌아왔던 그녀는 지원받던 기초수급비를 남편이 보내준 것이라고 둘러댔다. 어느덧 하율이가 10개월이 넘자 아이를 위해 세상에 떳떳이 나서겠다고 한 그녀는 본보를 통해 하율이와 새로운 시작을 다짐했다.
보도 후 어느정도 시간이 흐른 뒤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돌잔치를 잘 치렀다는 소식이었다. 그와 함께 보도 이후 하율이의 돌잔치 직전, 연락이 끊긴 줄 알았던 하율이 아빠가 연락을 해와 행사도 잘 치르고 아버님께 인사도 드렸다는 소식이었다.
아직 경제적으로 크게 호전된 것도 조건이 나아진 것도 아니지만 가장 큰 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불편한 몸으로 삼남매 홀로 키우던 父情, 안근섭(39) 씨
안씨가 1년여의 연애 끝에 아내와 결혼에 골인한 것은 지난 2005년 이다. 당시만 해도 안씨는 양식당 주방장으로 날렵한 칼솜씨와 팬요리로 인정을 받았던 시절이다.
하지만 인터넷에 빠진 아내는 어느날 불현듯 가출을 해버렸다. 가출 첫날 아내의 실종신고를 낸 그는 종일 미친듯이 찾아다녔다. 그 과정에서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한 뇌출혈로 입원을 하게된 근섭씨. 언제부턴가는 왼쪽 몸의 마비가 시작됐고 7월부터는 왼쪽을 쓸 수 없게 된 그는 결국 뇌병변 지체장애 3급판정을 받았다.
아이들을 생각해 가출후 다시 돌아온 아내를 다시 받아들이곤 했지만 그녀의 가출은 습관처럼 돼버렸고 그녀가 나갈때마다 그와 아이들의 생활은 헝클어질대로 헝클어졌다.
7살, 5살, 2살.
세 아이들이 커가면서 이것저것 사달라, 먹고싶다, 데려가 달라는 말에 난감해 지곤 하는 근섭씨. 그저 새 옷 한 벌씩만 사서 입혀줘 봤으면 좋겠다며 긴 한숨과 함께 뜨거운 눈물을 보이던 자식사랑이 뜨거웠던 아버지였다.
"그래도 관심써 주시고 도와주셔서 생활이나 마음에 많은 위로가 됐어요. 늘 감사한 마음이에요."
본보의 보도와 지원 이후, 아이들과 나들이를 한 번 가려고 했는데 그게 영 어렵다는 근섭씨는 날이 풀리는 봄에는 꼭 한번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한다.
장기투병 동생, 엄마손으로 보다듬던 누나 김영숙(가명·47) 씨
동생의 큰 병을 확인한 것은 2006년.
대학병원을 다녀온 동생은 신장이 좋지 않아 혈액투석을 받아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큰 수술이후 일주일에 2번, 3번 혈액투석을 받아야 하는 동생. 그때부터 신장을 기증받는 과정까지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하는 장녀 영숙씨(가명·47)의 본격적인 희생이 시작됐다.
건설회사에서 경리로 일해오던 그녀는 그 시기를 전후해 여러 가지 이유로 남편과 헤어져야 했다. 이후, 공장에서 2교대로 일하기도 하고 요구르트 배달도 하다가 얼마 전 부터는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수금원으로 일하고 있다. 시간은 남매를 점점 외롭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
투병중이던 종권씨가 뇌사자로부터 신장을 이식받게 된 것은 지난 9월1일이다.
수술 후 약간의 거부반응을 보이던 종권씨는 1주일간 중환자실에서 머물다 일반병실로 옮겨왔다. 말 못할 통증과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남매는 조금씩,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한발한발 앞으로 나아가려고 노력중이다.
현재 김종권씨는 별 거부반응이 없어 상태가 많이 호전돼 3주에 한번씩 병원에 가는 중이라고 한다.
"언제 한 번 꼭 인사드리고 싶어요. 그렇게 도움 받고 인사도 제대로 못했어요. 어려운 상황에서 이렇게 도움주셔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요."
언제부턴가 동생의 보호자로 아낌없는 희생을 하고 있는 누나 영숙씨는 본보에 꼭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고 거듭 거듭 말했다.
아이들에게 짐이 된다는 게 제일 힘들다던 문현자(49) 씨
"아이들을 뒷바라지 해주기는 커녕 짐만 지워주는 것 같아 그게 제일 힘들어요”
다발성 혈액암으로 수술을 앞두고 있던 문현자 씨는 힘든 상황에서도 자식에 대한 걱정이 먼저였다.
문씨는 5년여 전부터 김밥집에서 주방일을 해 왔다. 보통 오전10시부터 저녁6시까지 일하지만 바쁘면 밤 10시를 넘겨 일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아이들이 한참 커가고 돈이 드는 시기였기에 엄마는 종일 서서 일하면서도 자신의 몸을 돌볼 틈이 없었다.
그러던 중 지난 5월 어느 아침, 갑작스레 찾아온 다리마비.
암세포가 혈액을 타고 다니다가 머무는 곳에서 확장되면서 암을 발전시킨다는 다발성 혈액암 진단을 받았다.
이후 골수이식 비용이 고민이었던 그녀였지만 다행스럽게도 따뜻한 인연들이 닿기 시작했다.
본보의 보도를 보고 현자씨를 알아 본 천안초등학교 동창회에서 연말 모금을 통해 200여 만원을 지원해 주기로 한 것이다. 천안여고 동창 하나도 그녀를 확인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고.
힘든 상황에서도 자식들을 생각하는 그녀에게 본보도 내달초 시민들이 모아준 성금을 전달할 예정이다.
<이진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