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주 지방법원에서 열린 홍학순 선생의 재판 광경(‘동아일보’ 1933년 3월8일, 아쉽게도 선생이 어느 분인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8월의 독립운동가 | 홍학순(洪學淳) 15세 항일 독립운동 투신, 30세 일제법정서 순국독립기념관(관장 이문원)은 국가보훈처, 광복회와 공동으로 국권회복를 위해 헌신한 홍학순(洪學淳) 선생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선생은 1904년 8월15일 평안북도 의주군 주내면 어적동에서 출생했다. 독립기념관에 따르면 자료부족으로 선생의 가족이나 성장과정에 관해서는 상세히 알 수 없으나, 15세의 청소년기에 고향에서 의주 3·1운동을 경험하면서 민족의식이 고양됐을 것으로 추론하고 있다. 또한 기독교와 천도교 인사들이 대대적으로 참여해 전개한 의주의 3·1운동은 조국 독립과 민족 해방에 대한 투철한 의식을 촉발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3·1운동 직후 중국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한 것은 그 같은 의지의 표현이다. 1924년 2월 만주 관전현에서 대한통의부 5중대장 김석하의 소개로 대한통의부에 가입한 뒤 무장투쟁 방식으로 본격적인 독립투쟁을 전개했다.통의부 독립군으로 여러 차례 국내에 진입해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고, 1924년 11월 정의부를 설립한 뒤에는 그 산하 의용군 5중대 참사로 맹활약했다. 특히 1927년 7월 국내로 진입해 평북 구성군 조악주재소를 공격해 일경을 처단하고, 의주 읍내 금융조합에 쳐들어가 9백여원의 군자금을 노획하기도 했다. 이어 1927년 8월에는 동지들과 함께 양동작전으로 식민지 수탈기관인 식산은행 의주지점과 용만 금융조합을 동시에 공격해 9백80여원의 군자금을 노획했다. 이듬해 9월에는 요녕성 토성자에서 일제의 밀정을 처단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1929년 정의부·참의부·신민부의 통합조직으로 국민부가 성립되고, 그 산하 무력대로 조선혁명군이 결성되자 여기에 참여해 항일무장투쟁을 계속했다. 같은 해 9월 조선혁명군 동지들과 함께 평북 삭주의 광산사무소를 공격해 시가 2천3백여원어치의 금괴를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후에도 조선혁명군 동지들과 함께 압록강 하류 국경지방인 평안도 일대에 출몰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본 군경과 여러 차례 격전을 벌여 적들을 처단했다. 특히 1931년경 평북 국경지방에서 일경과 여러 차례 교전하면서 삭주와 구성 등지의 금광과 친일 부호배를 공격해 군자금을 모집하고 적들을 살상하는 등 크게 용맹을 떨쳤다.그러던 중 친일 밀정의 농간으로 1932년 1월 중국 안동현에서 붙잡혀 신의주 경찰서로 인도돼 혹독한 고문과 취조를 받았다. 그리고 1933년 3월 신의주지방법원, 1934년 1월 평양복심법원 등 일제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 해 5월18일 평양형무소에서 일제의 사형 집행으로 순국했다. 당시 선생의 나이 불과 30세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이와 관련 독립기념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고 관련 자료와 사진을 8월 한달동안 전시할 계획이다.홍학순 선생 주요 공적내용▶`1924 대한통의부에서 국내 진입 작전, 군자금 모금 활동.▶`1927 정의부 산하 의용군 5중대 참사로 활약.▶`1929~1931 조선혁명군으로 국경지방에서 일본군과 교전, 친일 부호배 처단.▶`1934 평양형무소에서 사형으로 순국.▶`1995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