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독립운동가 권인규 선생 (1843-1899.11.6)평범한 유학자,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독립투사로독립기념관(관장 이문원)은 국가보훈처, 광복회와 공동으로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한 소운 권인규 선생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선생은 1843년(헌종9년) 강릉 초당에서 태어났다. 초명은 헌규이고 자는 경행이며, 호는 동빈, 소운, 소은이라 한다. 본관은 안동권씨 추밀공파에 해당한다.선생은 어려서 한학을 수학한 뒤 향리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유학자였다.일제침략이 자행돼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되는 치욕적인 을미사면이 일어나 단발령이 공포되자 의병운동에 참여했다. 국모의 원수를 갚고 위정척사론에 입각한 척사부정, 즉 사악한 무리를 물리치고 정의를 세우기 위해 분연히 의병투쟁에 참여간 것이다.선생은 민용호 의병장이 이끌던 관동창의군 의병부대에 참여했다. 민용호 의병장은 1895년 12월 원주에서 의거해 원주, 평창 등을 거쳐 강릉으로 들어와 관동창의군을 조직했다. 이때 선생은 유학자로서 관동창의군에 참여해 각종 격문과 포고문, 효유문 등을 작성해 선포함으로써 의병투쟁의 당위성을 설파하고 일반 민중의 적극적인 동참을 호소했다.이 같은 선생의 의병투쟁 정신은 자손들에게 이어졌다. 아들인 권종해는 1907년 8월 군대해산 직후 봉기한 원주진위대 민긍호 의병부대에서 활동했다. 1908년부터는 이강년 의병부대에 합류해 백담사전투, 운두령전투, 단림전투 등에서 큰 공을 세웠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만주로 망명해 독립군의 유격장으로 활동하고, 3·1운동 중에는 충북 일대를 잠행하며 무력 항쟁을 부추기다가 일경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손자인 권기수도 3·1운동이 일어나자, 강원도 영월, 평창, 정선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만세시위 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다가 일경에 붙잡혀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고 그 후유증으로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이와 관련 독립기념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고 관련 자료와 사진을 7월 한 달 동안 전시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