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벼 수확기를 맞은 들녘에는 풍성한 수확과 결실의 기쁨 보다는 최악의 흉작에 따른 탄식이 흘러 나오고 있다. 벼 한포기당 이삭수와 이삭당 낱알수가 현저히 떨어진 것은 물론 그나마 쭉정이와 싸라기가 상당수 차지하고 있다.
벼베기 현장을 동행하겠다는 취재약속을 하고 지난 14일(화) 아침 일찍 풍세면 용정리를 찾았다.밤새 내린 이슬비와 안개 때문에 아침 일찍부터 벼베기를 하기엔 무리라고 했다.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 때문에 축축하게 젖은 벼이삭이 쉽게 마르지 않았다. 벼베기를 할 수 있을까.올해는 유난히 궂은 날씨로 일조량이 적어 20년만에 찾아온 흉작이라며 농민들은 걱정이 크다. 벼베기를 시작할 시간을 기다리다 넓은 뜰을 형성하고 있는 풍세면 용정리에서 몇 명의 농민을 만났다. 논에서 벼이삭을 한움큼 훑은 농민이 손바닥 위에 낱알을 올려 놓더니 손톱으로 톡톡 터뜨렸다.터뜨린 낱알에서는 새하얀 우유빛 액체가 흘러 나왔다. 더러는 흰 쌀이 아닌 푸른 빛을 띤 쌀알이 비집고 나왔다. 그렇게 분리를 하니 벼 낱알 1백개 중 10개 정도가 미숙한 낱알이었다. 빈 쭉정이도 많았다.정오가 넘어서 벼베기가 시작됐다. 두마지기 반(5백평)의 논에서 콤바인이 작업을 하는데 불과 40여분만에 끝났다. 작년에 45포대가 생산된 논이었지만 올해는 37포대에 불과했다. 포대를 열어 낱알을 살펴본 농민은 작년 기준 2등품 정도밖에 안 될 것 같다는 푸념이다. “올해는 글렀어. 거둘 알곡이 있어야 수확을 하지. 그래도 우리 논은 조금 나아. 절반도 수확을 거두지 못하는 집도 수두룩 하다구.”가을겆이가 한창인 들녘에서 바쁜 일손을 놀리고 있던 곽 린(51?풍세면 용정리)씨가 던진 말이다. 이날 곽씨 논에서 콤바인작업을 맡은 박수종씨는 곽씨의 논이 풍세 전체에서 가장 잘 된 논인데도 20% 가량 수확량이 줄었다고 말했다.땀흘린 들판, 허탈한 탄식뿐풍세면 용정리 박긍종(45) 이장은 “벼농사가 잘된 농가도 작년보다는 20∼30% 가량 수확량이 줄었다. 심한 농가는 70% 이상 줄어 수확해 봐야 먹을 것 하나도 없는 집도 많다”고 말했다.콤바인 영업을 하는 조영동(북면 양곡리)씨는 “벼를 벨 때 나락 떨어지는 소리만 들어도 수확량을 예측할 수 있는데 올해 같은 흉작은 일찍이 없었던 것 같다”며 “속 빈 쭉정이와 까락만 날리고 있다”고 말했다.조씨에 따르면 북면지역은 작년 수해로 침수피해를 입었을 때 보다도 30% 가량 수확량이 떨어질 것으로 예측했다.입장면 산정리의 이호근씨도 20∼30%의 생산량 감소를 예상했다. 이씨에 따르면 “올해는 일조량 부족으로 수확량 감소 뿐만 아니라 미질에도 상당한 영향이 있을 것”이라며 “수확한 벼 낱알을 살펴보면 쭉정이나 싸라기가 높은 비중을 차지해 상품성은 최악”이라고 말했다.천안지역은 태풍 매미로 인한 피해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하루가 멀다하고 내린 비와 궂은 날씨는 일조량 부족과 병해충 확산을 가져와 작물의 생육환경을 최악으로 만들었다. 이에 따라 곡물의 성숙이 늦어져 수확기도 예년보다 일주일 가량 늦어지고 있다.농림부는 지난 9월15일부터 전국 4천5백곳의 농지를 대상으로 표본조사를 실시한 결과 올해 쌀 생산량은 작년 3422만석보다 8.8%(310만석) 감소한 3121만석에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고 지난 2일(목) 밝혔다. 이는 냉해 피해로 대흉작을 기록한 지난 80년 이후 23년만에 최저 수준이라는 것이다. 조사자료에 따르면 충남지역은 11.3%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본격 수확기로 접어든 요즘 현지 농민들 말로는 30% 이상 감소할 것으로 정부 발표와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요즘 일년내 땀흘린 농민의 얼굴에는 풍성한 수확과 결실의 기쁨 보다는 허탈한 탄식만 흘러 나오고 있다.사상 최대의 풍작을 기록했던 작년엔 쌀값 폭락으로 신음한데 이어 올해는 사상 최악의 흉작을 기록하며 내다 팔 상품이 없어 탄식하고 있다.천안, 벼농사 지을 수 없는 곳?“도시개발이 한창인 천안은 본인의 땅이 아니라면 더 이상 벼농사를 지을 수 없는 곳이다.”쌀농사의 붕괴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동반될 수 있다는 점은 이미 많은 환경전문가들로부터 지적돼 왔다.이미 물값은 기름값보다 비싸다. 식량 자급률은 점점 떨어질 것이다. 곳곳에 공장이 들어서 황폐화 되고 천안시 같은 급팽창 도시는 더욱 가속화 될 것이다.쌀 산업을 보호해야 하는 이유는 식량자급 문제뿐만 아니다. 쌀산업 자체는 농민이 의도했건 안 했건 홍수예방과 대기정화, 수질보전 등 그 역할과 기능은 경제적으로 환산할 수 없는 막대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도시민들 누구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쌀이 생산되는 논에서 무한한 혜택을 직·간접적으로 누리고 있다.돈으로 환산하는 자체가 무리일 수 있으나 전국적으로 연간 수조원에 달한다. 논은 엄청난 양의 물을 가두고 있다. 벼가 자라는 동안 일년 내내 탄산가스를 흡수해 산소를 생산하고, 중금속 등 유해물질을 정화시켜 지하수 오염을 차단한다. 도농 복합도시인 천안시는 농촌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천안농민회는 올해 일조량 부족으로 감소한 생산량과 소득만큼 지자체나 중앙정부 차원에서 현장조사를 통한 정확한 실태를 파악한 후 적정한 지원이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에 따른 각종 영농자금 상환일을 연장하고 농자재 보급을 통한 지원이 따라야만 농촌과 농민들이 회생의지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농촌붕괴는 농촌만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민들이 함께 책임져야 할 사회문제라는 점도 강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