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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독립운동가 ‘강윤국·유만수’

마지막 의열투쟁, 부민관폭파의거의 주인공

등록일 2023년07월01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 부민관폭탄의거를 실행한 강윤국, 조문기, 유만수(왼쪽부터).


독립기념관(관장 한시준)은 국가보훈부, 광복회와 공동으로 강윤국·유만수 선생을 2023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강윤국, 유만수는 친일파 박춘금 등의 친일세력이 일본인과 함께 한인들을 침략전쟁에 강제동원하기 위해 1945년 7월24일 경성 부민관에서 아시아민족분격대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듣고 의거를 계획했다. ‘부민관폭파의거’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기간 중 전개된 마지막 의열투쟁으로, 광복 직전까지 이어졌던 한인의 독립의지를 보여준 의거였다.

강윤국은 1926년 서울 중림동의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이후 일본강관주식회사에서 견습공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생활하던 그는 독립이 머지않았음을 깨닫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결심을 하며 1942년 경 귀국했다. 이어 1945년 초순에 결성된 대한애국청년당에 참여해 친일파를 처단하고, 일제 식민통치 기관을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 부민관 전경.


부민관폭파의거 계획단계에서는 자신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국수공장에 자주 오던 헌병 장교에게서 권총을 탈취해 의거 당일 일본 헌병과 경찰을 저격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이들이 설치한 폭탄이 성공적으로 터지면서 아시아민족분격대회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후 박춘금과 일제는 현상금을 내걸어 수색에 나서지만 강윤국은 경기도 화성의 야학당에 피신해 항일거사를 또다시 계획하던 중 광복을 맞이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애국장을 수여했다.

한편 유만수는 1921년 경기도 안성군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겪은 민족차별 경험을 지켜보며 독립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독립운동에 참여할 기회를 모색하던 중 훈련공 모집공고를 보고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강관주식회사 가와사키 공장에 배치된 유만수는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함께할 동지들을 만났다. 1943년 5월 회사측이 민족차별적 내용을 담은 책자를 유포하자 유만수는 한인 노무자들을 결속해 파업을 주도했다. 

귀국한 그는 박춘금 등 친일파 세력들을 처단하기로 뜻을 모아 일본강관주식회사의 동료들과 함께 1945년 초순에 대한애국청년당을 조직했다. 유만수가 대한애국청년당의 임시의장으로 추대돼 부민관폭파의거를 추진했고, 의거 때 사용할 다이너마이트를 구하기 위해 수색변전소 작업장에 취직했다. 유만수는 매일 소량의 다이너마이트를 반출해 2개의 폭탄을 완성했다. 의거 당일 겉옷에 폭탄을 숨겨 부민관으로 들어간 그는 무대 연단 밑 등에 폭탄을 설치했다. 의거 이후 유만수는 일경을 피해 지리산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광복을 맞았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애국장을 추서했다.
 

김학수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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