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독립운동가 오면직 선생.
독립기념관(관장 윤주경)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오면직 선생을 2014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독립기념관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에서 그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개최한다.
선생은 1894년 6월 15일 황해도 안악에서 태어나 양산중학교와 경성측량강습소에서 수학했다. 이후 평양 대성중학교에 들어갔지만 중퇴했다. 고향에 있던 선생은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면서 독립운동을 시작했고 1920년에는 진남포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해외의 독립운동 상황을 파악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금 모집 활동을 지원했다.
1921년 11월 중국 상해로 망명한 선생은 1922년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가 결성되자 김구의 권유로 한국노병회에 가입하고 한국노병회 파견원으로 하남성 군관학교에 입학했다. 선생은 중국 망명 이후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면서 1930년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하고 한․중․일 아나키스트가 조직한 항일구국연맹의 기관지인 ‘자유’를 발행했다.
1932년 4월 초 선생은 백정기, 이용준, 류자명 등과 4월29일 상하이 홍구공원 폭탄 투척을 계획했으나 한인애국단과 협의해 윤봉길의사가 폭탄을 투척하게 됐다. 1933년에는 선생을 비롯한 백정기, 원심창, 정화암, 이강훈 등과 함께 상해 육삼정 연회에 참석한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 암살을 준비했지만 실패했다.
선생은 1934년 12월 남경에서 김구 등과 군관학교 졸업생을 모집해 한국독립특무대(韓國獨立特務隊)를 조직해 대장에는 김구, 참모장 안공근, 선생은 비서를 역임했다. 1936년 상해 아나키스트와 합류한 선생은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의 별동대인 한국맹혈단(韓國猛血團)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활동하며 친일파 처단과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1938년 5월16일 평양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그의 공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정리/이진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