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와 아버지도 이 호두나무에 올랐었다. 나(이종근?42 / 광덕면 광덕2리)도 어릴적엔 이 호두나무에 올랐다. 장난도 치고, 시원한 그늘 아래서 낮잠도 잤다. 이 호두나무만 보면 왠지 기분이 좋고, 생에 활력이 솟구쳤다.
개구쟁이 시절 온동네 친구들을 불러 나무자랑을 했다. 어느새 집 텃밭에 있던 이 호두나무는 온동네 꼬마녀석들의 놀이기구가 돼 버렸다. 호두나무 덕분에 나는 당당히 한 무리의 대장이 됐다.
술래잡기 할 때도 절대 발각되지 않았다. 싱그런 나뭇잎들은 내 작은 몸을 휘감아 숨겨주곤 했었다. 풋풋한 그 냄새가 좋았다. 나무위에 매달려 잠들 때도 많았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도 나무옆에만 있으면 무섭지가 않았다.
때론 녀석들에게 호두나무에 오를 수 있는 특혜를 주면서 온갖 특권을 누렸다.
구슬이나 딱지를 상납 받았고, 삶은 고구마와 감자를 얻어먹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높은 곳은 언제나 내 차지였다. 신성불가침의 그 자리에서 나는 유년시절을 보냈다.
이 호두나무는 조상들이 물려준 가장 큰 재산이며 축복이었다. 또한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가장 큰 스승이다. 내 아버지도, 내 할아버지도, 할아버지의 아버지도, 할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도…, 하지만 그 나무가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올해 일흔 두해를 살아오신 내 어머니가 열아홉에 시집오던 그 날도 이 호두나무가 가장 눈에 들어왔다고 하신다. 시집살이가 힘들 때 어머닌 이 호두나무 뒤에서 몰래 눈물을 삼키셨다. 어머니의 어머니도,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도…
철들 무렵 난 이 호두나무에서 많은 꿈을 꾸었다. 밤하늘의 모든 별들이 내 눈안에 흘러 들어왔다. 어린 나의 눈에 비친 은하수는 경이롭기까지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별들이 나타나고 사라지며 자리를 바꿨다. 북두칠성, 오리온, 페가수스, 카시오페이아…
알퐁스 도데의 ‘별’이란 소설을 떠올리며, 목동과 스테파네트 아가씨의 별자리를 상상했다. 지금은 밤하늘의 별이 되셨을 아버지께 심한 꾸지람을 듣던 어릴 적 어느 날, 난 이 호두나무에 기대 울고 또 울었다. 호두나무에 매질하며 화풀이를 해댔다. 울다 지치고 설움에 지쳐 기대선 내 작은 몸짓 하나하나를 이 호두나무는 다 받아 주었다.
내가 아버지가 된 어느 날, 난 이 호두나무에서 또다른 나를 만났다. 내 아들은 그 어릴적 나와 똑같은 모습으로 호두나무에 기대 있었다. 울다지친 어린 아들을 감싸안았다. 집으로 돌아오며 어릴 적 아버지 생각에 공허한 미소가 흘렀다.」
쓰러진 고령의 호두나무를 바라보며 이종근씨는 긴 푸념을 늘어놓았다.
지난 31일(토) 무지막지한 15호 태풍 ‘루사’가 조용한 산골마을을 덮쳤다. 바람이 점점 거세지던 저녁 5시경. 수령 3백년 이상은 됐음직한 호두나무는 어른 두 명이 감싸안아야 잡힐 굵기에 길이 30m는 됨직한 거대한 몸을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뿌리째 뽑혀 쓰러지고 말았다.
이제 열 두 살된 이종근씨 아들 금호가 이 호두나무를 놀이터 삼아 뛰어놀 차례인데, 그리고 그의 손자에게도 물려줘야 하는데…
이씨의 나이 마흔 둘. 이씨는 이제 이 호두나무를 잊고 어린나무를 다시 심으려 한다. 삼백년 후, 그때 이씨의 후손들이 대장노릇하며 다시 뛰어놀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