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닫기
뉴스등록
맨위로

흔들리는 농업, 근본은 지켜야 한다

흔들리는 농업

등록일 2001년03월10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천안농민회 회장 정 진 옥 “도대체 무슨 농사를 지어야 먹고 살 수 있을까. 우리나라 식량자급률은 30%도 안된다는데 농산물이 과잉 생산이라 가격이 폭락할 수밖에 없다니, 이 기막힌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또한 농산물가격은 폭락하는데, 각종 영농 자재비는 왜 그렇게 뛰는지…”“농민이 대접받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최소한 정직하게 일한 만큼 소득이 보장되길 바랄 뿐이다. 자동차, 반도체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식량을 대신할 수는 없지 않는가.”꽃샘추위가 한참 매서운 들녘에서 농민운동가 천안농민회 정진옥(49) 회장을 만났다. 정 회장은 지난 겨울 내린 눈이 채 녹지도 않은 들판에서 취재기자를 맞았다. 그리고 이른 봄볕보다 더한 싸늘한 바람을 함께 맞으며, 긴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처음엔 차분한 목소리로 때론 격앙된 목소리로 조목조목 농촌현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의 외롭고 처절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그리고 정 회장이 왜 한겨울 추위보다 매서운 꽃샘추위의 강한 바람을 함께 맞으려 했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논둑은 아직도 지난 겨울 내린 눈이 꽁꽁얼어 있었고, 조금씩 녹아내린 양지는 발디딜 때마다 흙이 덕지덕지 들러붙어 신발을 무겁게 만들었다.“이놈의 날씨는 계절이 바뀌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풀리지만, 농민들 가슴에 들어앉은 응어리는 갈수록 쌓이기만 하니 답답한 노릇이야.”정 회장은 30년 가까이 농사를 지어왔다. 처음엔 뿌린대로 거둘 수 있다는 땅의 정직함만을 믿었다. 그러나 열심히 일 할수록 어려워지는 농촌현실과 쌓이는 빚, 연대파산, 이어지는 농민자살 소식에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정 회장과 취재기자는 일정한 순서나 격식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취재에 앞서 무엇을 물어야 할지, 필요한 부분과 용건을 메모해 정 회장을 만났지만 막상 그를 대하자 취재보다는 그냥 대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보통 취재기자는 나름대로 정한 규칙에 따라 말하고 답을 얻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내용이 인터뷰 의도와 다르거나, 화제가 다른 곳으로 흐르면 이내 원점으로 돌리곤 하지만 왠지 정 회장 앞에선 그럴 수가 없었다.그리고 아예 취재수첩도 꺼내지 않고, 메모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던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가슴으로 느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와 정 회장과 나눴던 대화내용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정리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은 당연. 농촌현실과 농민입장, 정부정책 등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왔지만 정부와 농촌의 현실이 자꾸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만 재확인했다.현재 농민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문제. 이에 대해 정 회장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농업을 경제적 가치로만 따지는 무지한 짓거리에 도대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농업을 협상의 희생물로 내던지려는 정부작태는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으며, 머지않아 국민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칠레는 포도, 사과, 배, 복숭아 등과 육류에 있어 세계적 경쟁력을 가진 나라다. 만일 공산품 몇 개 팔려고 칠레산 농산물개방의 물꼬를 튼다면, 그 이후 쏟아질 봇물은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WTO 협상에서 다른 농산물 수출국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왜 칠레는 되는데 자기 나라는 안되냐며 엄청난 공세를 퍼부을 텐데… 결국 우리나라 농업은 자멸하고 말 것이고 식량식민지가 돼 버릴 것”이라며 강한 어조로 경고했다.정 회장은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말을 이었다. “몇 년전 칠레산 포도가 수입됐을 때 천안 입장, 성거, 직산을 비롯한 국내 거봉포도 농가는 막대한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그 후유증은 너무도 처절할 뿐만 아니라 헤어나지 못하는 농가도 많다.뿐만 아니다. 중국과 맺은 치욕적인 마늘협정을 생각하면, 우리 한국정부의 국제 협상력이 얼마나 무능한지 알 수 있다. 80%의 부품을 수입해서 조립한 휴대폰을 팔려고, 연간 3조원 규모의 마늘시장을 중국에 송두리째 내준 것이 우리 정부의 협상 수준이다.” 정 회장은 이제 더 이상 농민이 살 수 있는 곳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늘시장 내주고, 과일시장 내주고, 축산물 가격은 매스컴 움직임에 따라 들쭉날쭉, 폭설피해 상처도 채 아물지 않은 상황에서 구제역 공포에 시달리고, 이대로 가면 농촌이고 농민이고 모두 죽을 것이다. 앞으로 쌀이라고 무사하다는 보장 있는가.”“농가부채 문제를 제기하며, 농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을 때 정부는 농민들이 돈을 쓰고 갚지 않겠다는 도덕적 해이로 몰고 갔다. 그러나 농민들의 주장은 빚을 갚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대책마련을 요구한 것이었다.농촌지역은 연대보증이 거미줄처럼 맞물려 어느 한 농민이 파산하면 한 마을, 한 지역까지 연대파산을 면치 못하게 된다. 농가소득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갈수록 빚더미는 커져가는 것이다.빚을 갚을 수 있고, 신명나게 일할 수 있는 농촌환경을 요구한 것이지 부채를 탕감해 달라는 것이 아니었다.농협 역시 농민의 권익을 위한 조직이라고 보기 힘들다. 현재 농협은 농촌과 농민을 지배하고 있다. 당당히 농협을 찾는 농민이 얼마나 되겠는가. 농협은 신용사업과 농정관련 경제사업으로 분리해 농민을 위한 생산자 조직으로 전문화해야 한다.그리고 현재 경제가 어려워진 것은 노동자나 농민의 탓이 아니다. 경제 위기는 재벌과 관치금융, 어눌한 정부가 만들어낸 합작품이다.풍요의 혜택은 그들이 다 누리고, 빈곤과 고통은 언제나 서민들의 몫이었다.그들의 사치, 향락을 위해 농민 노동자들은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다. 또 그들이 힘들다고 투정할 때 허리띠 졸라매고 밥그릇을 줄여야 했다.이렇게 평생을 바치며 살았는데 이제 삶의 터전까지 앗아가려 한다. 이제 더 이상 양보할 수도 없고, 물러설 수도 없다. 더 이상 고통을 요구한다면 최소한의 삶 자체마저 포기해야 하니까.”정오에 만난 정 회장과의 대화는 해 저물 무렵까지 끝나지 않았다. 아직도 다 못한 말이 있는 듯했다.정 회장은 현상신 전 회장의 뒤를 이어 지난 2월부터 천안농민회 조직을 이끌고 있다. 새로운 집행부를 구성한 정 회장은 ▲생산성 있는 농민회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또 ▲시정참여 ▲농협개혁 ▲지역특산물 활성화 ▲농축산물 가격보장 등을 위해 기획단을 구성해 강력히 추진한다는 각오를 다졌다.

이정구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관련뉴스 - 관련뉴스가 없습니다.
유료기사 결제하기 무통장 입금자명 입금예정일자
입금할 금액은 입니다. (입금하실 입금자명 + 입금예정일자를 입력하세요)

가장 많이 본 뉴스

종합 뉴스 라이프 우리동네 향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