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2012 김덕수(가명·57)
폭설과 한파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주.
천안IC를 지나 단국대학교로 들어가려면 지나야 하는 작은 다리 ‘제2신부교’.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그 다리 아래에서 초로의 김덕수씨(가명)를 만났다.
김씨는 영하10도를 넘나드는 요즘, 난방기구 하나 없이 얇은 텐트에서 솜이불하나로 추위와 싸우고 있었다. 텐트 주위로는 냄비 몇 개와 간단한 가재도구가 눈에 띈다. 텐트 안 바닥에는 스티로폼이 깔려있고 작은 접이상 위에는 자명종 시계와 무엇이 들었는지 알아보기 힘든 검은 비닐봉지들, 여기저기 옷가지가 어지러져 있었다.
그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2년 전부터라고 한다.
건강이나 영양상태는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형편이다보니 가늠조차 해보지 못했다는 김씨. 건강검진을 해 본 것은 수십년 전, 징병검사를 했을 때 뿐이라고 한다.
운수 좋은 날이면…
“요즘 같은 날씨에서는 자다깨다 거의 뒤척이다 밤을 지새는 경우가 많아요. 식사요? 아침에 버너로 넉넉히 밥을 해놓고 먹은 뒤 점심은 고물을 주우러 다니며 대충 챙겨먹습니다. 저녁때는 돌아와서 아침에 남은 밥을 끓여먹고요. 반찬은 보통 소금하고 먹는데 요즘은 옆에 고물상에서 준 김치를 먹고 있어요.”
영양이 부족해서 어쩌냐는 질문에는 “재수 좋게 고물을 잔뜩 줍는 날엔 중앙시장까지 가서 한근에 2000원하는 돼지껍데기를 사 먹기도 하고 그래요. 자주는 못 그러지만(웃음).”
몸무게가 46㎏이라는 그는 초췌한 얼굴에 어색한 미소를 띄우며 어렵게 본인의 사연을 털어 놓았다. 이 추운 겨울, 그는 어떤 사연이 있길래 미끄럽게 얼어버린 다리 밑에서 혼자 생활을 하게 됐을까?
20대에 한쪽 눈 실명, 30대에 찾아온 신장염
2남3녀의 차남인 그는 경북안동이 고향이라고 한다.
바로 윗 누나와 8살, 큰 누나와는 20살 차이가 날 정도로 형제들과 나이차가 컸던 그는 집안이 워낙 가난해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했다. 젊은 시절은 주로 대구, 수원 등지에서 막노동을 하며 삶을 이어왔다. 그러다 20대 중반이던 1979년, 보다 나은 일을 하려면 공부를 해야겠다 싶어 책읽기를 시작했었는데 그때 눈에 이상이 생기고 결국 왼쪽 눈이 실명되고야 말았다고.
몸이 재산인 노동일을 하는 입장에서 한쪽 눈이 불편하다보니 모든 일이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어렵게 노동으로 삶을 이어 왔지만 10여 년 전에는 급성 신장염을 앓게 됐고 이후로는 오른쪽 눈마저 백내장에 걸려 글자를 알아보기 힘든 상태가 돼버렸다.
몸은 이곳저곳이 그 이후로도 고장나기 시작했지만 형편상 약도 제대로 챙겨 먹을 수 없었고, 4년 전 현장에서 만났던 친구와 일하러 왔던 천안에 그 혼자 자리를 잡게 됐다.
처음에는 고시원에서 생활을 하며 고물을 주워 생활을 시작했지만 몸이 약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다보니 고시원비를 제대로 낼 수가 없는 상황이 됐고 결국 고물을 주우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눈여겨 보아두었던 지금의 ‘제2신부교’ 아래에 거처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은혜를 다 갚을 순 없지만…
처음 김덕수씨를 알아 본 것은 인근의 한 고물상 사장이다.
신분증을 내고 고물을 줍겠다고 리어카를 빌리러 온 그가 혹한이 몰아치는 겨울에도 다리 밑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러다 혹시 잘못될 수도 있겠다 싶었던 고물상 사장은 천안시에도 연락을 취하고 김장도 나눠주고 종종 몸도 녹일 수 있게 해 줬다. 사연을 전해들은 천안시청 사례관리 전문요원인 정정진씨는 김씨의 ‘근로능력평가용진단서’를 발급하고 기초생활수급자 선정을 추진 중이다.
최근에는 그 작업에 필요한 주소지 확보를 위해 직접 인근 빈 방을 찾는 등 거처마련을 위해 동분서주중이다. 수급자 선정이후에는 백내장 수술까지 지원해 줄 예정이라고.
김씨는 자신에게 따듯한 손길을 내밀어준 이런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다 표현할 길이 없다며 송구스러워 한다.
“제 바람이요? 만약 수급자에 선정된다면 수급비를 아껴서 고물을 싣고 다닐 수 있는 경운기 같은 것을 하나 사고 싶어요. 제가 받은 은혜를 다 갚기는 힘들겠지만 열심히 사는 모습이라도 보여드리는게 지금의 바람이에요.”
기자와 함께 따듯한 국밥을 함께 먹으며 밤새 언 몸을 잠시나마 녹인 김씨는 새 삶에 대한 희망의 싹을 조금씩 틔우려 하고 있었다.
<이진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