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에 세운 나무장승
“학생들이 집으로 다 돌아가고, 주위가 깜깜해지도록 나무를 깎고, 또 깎았지요. 하루에 하나씩 깎은 나무 기둥들은 일주일이 지나서 멋진 장승이 되었고, 전통문화와 관련한 교육자료로 활용하고자 학교 뒷 편에 장승공원을 만들어 세워뒀어요. 그러고 보니 벌써 9년 전의 일이네요.”
오목초등학교 이재훈 교감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에는 오래된 은행나무와 함께 나무장승 한 기가 서 있었다.
다소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나무장승은 본래 다섯 기였으나 소나무로 만든 네 기의 장승은 세월의 풍파에 사라지고, 은행나무로 만든 한 기만 남아있었다.
“저 녀석도(나무장승) 저처럼 늙어가나 봐요. 여기를 한 번 보세요. ‘으뜸 배움터’라고 쓰여진 부분이 양각된 것처럼 살짝 튀어나와 있지요? 글씨가 쓰여진 부분을 제외하고 비와 바람, 햇볕에 깎였기 때문이에요. 또 저기를 보세요. 저 선생님도 장승을 함께 깎았을 때에는 꽤 젊은 편이었는데 지금은 모두 함께 늙어가고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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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50·오목초등학교 교감) |
시골학교 선생님은 ‘내 천직’
1993년 오목초와 처음 인연을 맺은 그는 1998년 학교를 떠난 후 2003년에 다시 학교를 찾아왔고, 2011년에 또다시 찾아왔을 때에는 교감으로서 부임했다. 모두 자신이 오목초등학교를 희망해서 이뤄진 일들이라고.
“1987년에 태안군 원동면 방갈리에 위치한 방갈초등학교(현재 원북초등학교 방갈분교)에서 교직원의 첫 걸음을 시작했어요. 태어나고 자란 곳이 시골이라 한적한 시골학교에서의 근무가 저와 잘 맞더라구요. 그런면에서 오목초는 저와 찰떡궁합이라고 할 수 있어요. 1993년 3월에 발령받아 1998년 2월까지 근무했는데 다른 학교에 가서도 자꾸 생각이 나더라구요. 그래서 오목초를 다시 지원했지요.”
장승공원 다음으로 안내받은 곳은 오목초 졸업생들의 사진이 걸려있는 중앙현관이었다. 그는 벽면에 걸려있는 액자 하나를 가르키며 “저기 저 사람이 저에요. 그때는 조금 촌스러웠던 것 같아요”라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가 가르킨 액자속 사진에는 ‘오목국민학교 제50회 졸업기념, 1994년 2월’이라고 적혀있었으며, 맨 아랫줄 왼쪽에서 두 번째 자리에 조금은 경직된 듯 앉아있는 그를 발견 할 수 있었다.
“오목초등학교와 함께한 세월이 자그마치 10년이네요. 처음 오목초에 왔을 때에는 교직을 시작한 초년 시절이라 열정하나로 5년을 보낼 수 있었어요. 농촌학생들의 잠재된 특기를 길러 주고자 육상과 학력경시, 과학전람회 등 각종대회를 지도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 녀석들이 곧잘 입상하더란 말이죠.”
오목초와의 남다른 인연
2003년 7월 오목초를 다시 찾은 그는 ‘학교 숲 가꾸기 사업’을 담당하면서 자작나무와 나무수국, 백송, 개쉬땅나무 등 우리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100여 종류의 나무를 심었다. 그 덕분에 오목초에는 현재 2만㎡의 숲이 조성됐고, 학생들은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봄에는 아카시아 향기를, 여름에는 딸기와 오디를, 가을에는 밤과 상수리나무 열매 등의 아람을 주울 수 있게 됐다.
“2003년 당시 학교 숲 가꾸기 사업을 진행하면서 장승공원을 만들려고 했는데, 장승 한 기에 50만원이라는 소리를 듣고 직접 만들게 됐어요. 학교 숲의 고사목을 이용해 만들다 보니 비용이 전혀 들지 않았지요. 그러나 장승을 만들 나무를 깎으면서도 그 장승이 어떤 의미가 될지 그때 당시에는 전혀 몰랐어요.”
그가 지난해 오목초 교감으로 발령 받았을 때 가장 먼저 찾은 곳이 바로 장승공원이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남다른 감회를 느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많은 교사들이 한 학교에서 두번 근무하는 것도 어려운데 그는 세번이나 근무하게 됐으니 인연의 깊이가 남다르다는 설명이다. 그 증거로 나무장승이 ‘떡’ 하니 버티고 서 있으니 말이다.
오목초등학교에서 10여 년을 근무한 이재훈 교감은 “지금은 여름방학을 활용해 노후 된 교실바닥을 교체하고 있는데, 일손이 모자르다 보니 선생님들과 함께 책걸상을 비롯해 각종 비품을 교실 밖으로 옮기고 있지요. 이번 작업이 끝나고, 선선한 가을이 오면 나무장승을 만들어 볼까 해요”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