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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민족학교 교사 활동, 민족유일당 운동 펼쳐

7월의 독립운동가 이광민 선생

등록일 2010년07월02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7월의 독립운동가 이광민 선생. 독립기념관(관장 김주현)은 국가보훈처, 광복회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이광민(李光民) 선생을 2010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7월 한달간 야외특별기획전시장에서 그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개최한다.

이광민 선생은 경북 안동시 법산동에서 부친 봉의(鳳義)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이문형(李文衡)이며, 호는 자화(子華)로 만주지역 독립운동의 대명사인 석주(石洲) 이상룡의 조카였다.
선생은 백부인 이상룡이 1907년 세운 협동학교에 입학해 신학문과 나라사랑 정신을 배웠다. 경술국치 직후인 1911년 망국의 현실을 고민하던 이상룡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에 나서자 선생도 함께 망명했다.
서간도 유하현에 도착한 선생은 백부 이상룡을 도우며 독립사상을 배웠고 마침내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해 민족교육과 군사교육을 이수했다. 신흥학교  졸업 후 선생은 1916년 부민단의 본부가 있는 통화현 삼도구에 있는 동화학교의 교사가 돼 한인 2세들의 민족교육에 전념했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서간도 지역에서도 이에 호응해 1919년 4월 한족회를 설립해 독립운동 단체를 규합했다. 한족회는 1919년 11월 서로군정서로 명칭을 바꾸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의 무장세력임을 천명했다. 선생은 서로군정서의 최고 지도자인 독판으로 선출된 백부 이상룡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좌하며 독립운동 자금 마련, 무기 구입, 무장 독립군의 국내 진입작전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청산리 대첩을 거두는데도 일익을 담당했다.
1925년 9월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으로 선출된 이상룡을 도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직 정비를 위해 상해에서 일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만주보다 효율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할 곳은 없다고 판단하고 이듬 해, 2월 남만주 반석현으로 돌아왔다. 선생은 새로 개편된 정의부의 재무위원장에 선출됐다. 선생은 정의부와 한족노동당 업무에 많은 활동을 했고, 1920년대 중반 만주지역에서 전개된 민족유일당운동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다.
1927년 4월 길림현 신안둔에서 개최된 만주독립운동 단체의 통일운동에 정의부 대표로 참여해 삼부, 즉 정의부·신민부·참의부의 통합을 통한 민족유일당 결성을 위해 노력한 것이다. 삼부통합운동을 위해 노력하던 선생은 백부 이상룡의 병고가 위독하다는 기별을 받고 만사를 제쳐두고 이상룡이 머물고 있는 길림성 서란현으로 가서 백부의 마지막을 함께 했다. 

이상룡의 서거 이후 그의 일가 대부분이 국내로 돌아 왔으나 선생은 끝까지 만주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한 동지들을 지도하며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한평생을 만주지역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과 항일투쟁에 노력한 선생은 광복 소식을 들었으나 척박한 만주 땅에서 얻은 병고에 시달리다 광복 두 달 만인 1945년 10월 만주 땅에서 운명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정리/ 이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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