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통치의 심장부에 폭파를 시도한 의열단원 김익상 선생.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광복회는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김익상(金益相)선생을 2010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그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6월 한달간 야외특별기획전시장에서 개최한다. 여기서는 선생이 폭파의거를 결행한 조선총독부 등 관련사진 15점이 전시된다.
김익상 선생은 1895년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지금의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921년 베이징(北京)에서 의열단장 김원봉과 만나,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세하고 의열단에 가입했다.
선생은 1921년 9월 폭탄 2개와 권총 2정을 소지하고 국내로 들어와, 9월12일 전기 수리공으로 신분을 속이고 당시 서울 남산에 있던 조선총독부로 들어가 비서과와 회계과에 폭탄을 던졌다. 회계과에 던진 폭탄이 굉음을 내며 폭발해 조선총독부는 아수라장이 됐다.
조선총독부 폭파의거 후 베이징으로 돌아온 선생은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가 상하이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의열단원인 오성륜·이종암과 함께 다나카를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1922년 3월8일 다나카가 상하이 황포탄 세관부두에 도착하자 먼저 오성륜이 그를 향해 권총을 발사했으나 미국인 부인이 맞고 쓰러졌다. 다나카가 놀라 도망치자 선생이 권총을 쏘고 계속해 폭탄까지 던졌으나 불발이었다. 아쉽게도 다나카를 처단하려는 거사는 좌절됐고 현장에서 선생과 오성륜은 붙잡혔다. 선생은 이 황포탄 의거로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에 수감됐다가 나가사키(長岐)로 호송됐다.
선생은 같은 해 11월에 사형을 언도받았지만, 짜인 각본대로 진행되는 일제의 재판에 기대할 것이 없었고 조국의 독립에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사형 판결에 상고하지 않았다.
선생은 감형을 받아 16여 년의 옥고를 치른 후 석방돼 고향으로 돌아 왔지만 일본인 고등경찰에게 연행된 후 이후의 행적이 확인되지 않는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정리/이진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