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대륙을 누빈 여자광복군 오광심 선생.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광복회는 일제 강점기 중국에서 민족교육 교사 및 한국광복군 모병활동을 전개한 오광심(吳光心)선생을 2010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독립기념관은 5월 한 달간 제6전시관 입구 우측에 위치한 특별기획전시장에서 선생의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개최한다.
여기에는 선생이 남편 김학규 장군과 함께 찍은 사진 등 관련 사진자료 20여 점이 공개될 예정이다.
오광심 선생은 1910년 3월15일 평안북도 선천군 신부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남만주로 이주한 선생은 1929년, 정의부에서 설립한 화흥중학 부설 사범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한족회에서 설립한 배달학교와 유하현 삼원보의 동명중학 부설 여자초등학교에서 한인 자제들에게 민족교육을 가르치는 교사로 활동했다.
1920년대 후반 남만주지역의 독립운동 세력은 국민부를 중심으로 통합됐고 산하에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을 조직해 대일항전을 본격화했다. 선생은 배달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조선혁명당에 참여해 활동하다가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교사를 그만두고 조선혁명군 사령부 군수처에서 근무했다. 이후 조선혁명군 유격대 및 한중연합 항일전에서 지하 연락활동을 전개하는 등 항일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조선혁명군 참모장으로 활동하고 있던 백파 김학규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과 이듬해 만주국의 설립으로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독립군의 여건이 상당히 악화되는 가운데, 조선혁명군 사령부에서는 만주에서의 지속적인 항일투쟁을 위해 임시정부에 대표를 파견해 원조를 요청하기로 했다. 이에 선생은 조선혁명당·군의 대표로 선발된 남편 김학규와 함께 난징(南京)에 도착해 조선혁명군의 대일항전 상황과 인력 및 물자 보급의 필요성 등을 역설하는 등 임시정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와 함께 관내지역의 독립운동 상황을 조선혁명당 본부에 전달하는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1935년 7월 관내지역 독립운동 단체 간의 통일정당인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자 선생은 이에 참여해 민족혁명당의 부녀부 차장으로 활동했다.
중국 관내지역을 이동하던 임시정부가 1940년 5월 충칭(重慶)에 안착한 후 9월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자 선생은 총사령부에서 사무 및 선전사업을 담당했다.
이후 광복군총사령부가 시안(西安)으로 이동하자 선생 또한 시안으로 자리를 옮겨 여자 광복군 대원인 지복영·조순옥 등과 함께 기관지 ‘광복’의 간행에 전념했다.
1942년 2월에는 징모제6분처의 대원으로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서 지하공작을 통해 광복군 대원의 모병활동을 전개했다.
광복 이후 선생은 상하이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주호판사처 처장으로 활동하는 남편을 도와 한인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안전한 귀국을 위해 노력했다.
1946년에는 선양(瀋陽)으로 가서 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1948년 4월에 조국으로 돌아왔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77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정리/이진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