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장기미독립만세운동 제83주년 기념식이 지난 20일 3백여 학생·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입장면 양대리에서 열렸다.
-3백여 학생·주민 참석, 숭고한 민족정신 되새겨
“여기 기미년 삼월 일본 제국주의의 총칼에 적수공원으로 봉기한 천안시 입장 사람들의 독립만세 함성과 성스러운 애국혈의 뜻을 새기니 그 애국정신이 만대에 계승되고 온 나라에 퍼져 나가리라.
이 고장은 산천이 아름답고 인걸이 끊임없이 나와서 백제 온조의 도읍이래 유서깊은 충의열사의 고장으로 되어왔다. 일제가 우리 조국을 침략했을 때에도 한말에는 이 고장에서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이 부단히 전개되더니 기미년에는 다시 독립만세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기미년 삼월일일 독립선언과 독립만세운동의 물결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갈 때, 이 고장 입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이 폭발하였으니, 곧 삼월 이십일의 양대 사립 광명학교의 나이어린 여학생들 및 양대 장군들의 봉기와 삼월 이십팔일 직산금광 광부들의 봉기가 그것이다.”<기념탑 비문 中>
애국선열들의 숭고한 독립정신과 애국사상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입장기미독립만세운동 제83주년 기념식이 지난 20일(수) 오전 10시 입장면 양대리 기념탑 앞에서 이근영 천안시장을 비롯한 유족, 기관?단체장, 주민, 학생 등 5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입장기미독립운동기념사업회(회장 민태일) 주관으로 열린 이날 행사는 유공자 표창과 경과보고에 이어 독립선언문 낭독, 기념사, 축사, 만세삼창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민태일 회장은 “나라가 부유하고 번영할 때 나라사랑을 외치며, 국제무대에서 박수받기는 쉽다. 그러나 주권을 빼앗긴 당시 핍박을 무릅쓰고 외세에 당당히 맞서 일으켰던 민족적 거사야 말로 오늘날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입장기미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20일 입장면 양대리 광명보통학교 학생과 직산금광회사 광부 등 7백여명이 만세운동을 벌인 사건으로 독립만세운동 확산의 계기를 마련했으며, 애국선열의 숨결을 기리고자 지난 89년 기념탑을 건립하고 매년 기념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신용하(서울대?문학박사) 교수가 쓴 기념탑 비문에 따르면 입장만세운동은 3?1 만세운동을 대표하는 유관순 열사의 아우내장터 만세운동보다 열흘 앞선 거사로 높게 평가되고 있다.
또한 당시 거사를 주동했던 계층은 10대의 광명학교 어린 여학생 세명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직산광부들에 의해 또다시 만세운동이 펼쳐지는 계기를 제공하는 등 그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밝혔다.
-입장 3·20 만세운동 개요-남녀노소·빈부귀천·종파 초월한 민족적 거사
기미년(1919) 3월20일 10시경.
양대리에서 6백여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날 어린 여학생 민옥금(일명:민원숙), 한이순(일명:한도숙), 황은순(일명:황현숙) 등 3명과 교사 강기형, 광부 안시봉, 김채준, 조쌍동, 김경열 등이 주동이 돼 사립광명학교 학생 수십명과 4백∼5백호의 주민 6백여명이 만세를 부르며 4㎞ 떨어진 입장시장으로 행진했다.
행진중 천안에서 출동한 일본헌병과 충돌해 50여명이 체포되고 나머지 일부는 시장에 이르렀다. 이날은 마침 입장장날이라 인근에서 장보러 온 수천명의 농민, 상인, 주민이 한데 어우러져 만세를 외쳤다.
양대사립여숙(광명학교) 교사 임영신(전 중앙대 총장)은 1919년 2월28일 학교로 찾아온 함치영 목사(전 부통령)로부터 독립선언서 한 장을 받아 수백매를 등사해 3월2일 전주로 가져갔다.
또한 남은 이들은 여학생 3명을 불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토록 일러줌으로써 여학생 민옥금, 한이순, 황은순은 그날부터 태극기를 몰래 만들어 양대리 조쌍동에게 전가구에 돌려주며 3월20일 양대리와 입장장날 일제히 만세를 부르도록 연락했으며 조쌍동은 마을 공회당에 게양된 일장기를 내려 불태워 만세운동 열기를 고조시켰다.
며칠 후 직산 금광회사(양대리 소재) 고용인, 박창신은 3월25일에 동료 한근수, 안 은 등과 모의해 거사일을 3월28일로 정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광부 2백명과 함께 양대헌병 주제소를 습격해 무기를 빼앗고 전화선을 절단하는 등 격렬한 충돌을 했다.
이때 8명은 체포되고 광부 남기철과 신일성, 김 모 등 세명이 그 자리에서 순국했다.
이 운동은 3?1운동보다 앞서 2월28일부터 시작된 최초의 여성운동으로 평가되며 빈부귀천을 떠나고 종교와 종파도 초월하고 농민, 상인, 광부, 학생 등 직업도 뛰어넘어 남녀노소에 이르기까지 전주민이 혼연일체되었다.
안시봉 열사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옥중에서까지 고초를 겪어가며 한국인이 왜 일본 재판을 받느냐며 끝까지 투쟁하다 중형을 받은 재판기록이 생생히 남아있다. 이는 전국에서도 표본이 되는 운동이며 충청지역에서는 최초의 순국자를 발생시켰고, 입장시장에 드나들던 인근지방으로 독립만세운동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제공/입장기미운동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