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성산 전투는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맞서 싸운 최초의 전쟁이라는 점과 반 봉건 반 제국주의 운동의 시발점이라는데 세계사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동학농민은 모조리 살육하라!
갑오년(1894) 대대적으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운동은 조선정부의 군사력으로는 제어가 불가능할 정도로 강세를 보였다.
당시 농민군을 폭도로 규정한 조선정부는 청나라에 지원병을 요청하기에 이르렀고, 일본군은 청국의 파병을 빌미로 이미 침입한 상태였다. 이때 동학농민군 진영에서는 외세의 개입, 특히 일본의 침략이라는 점을 간파하고 동족끼리 피흘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방침을 세웠다.
6월11일 동학농민군 진영은 조선정부와 전주화약을 맺고 무혈입성했던 전주성에서 철수했다. 따라서 중국이 출병한 공격대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으며 일본의 출병 구실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중국은 일본에게 쌍방이 공동으로 철병할 것을 제의했으나 일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철병을 거부했다.
이때 일본이 노리고 있던 것은 중국군을 조선에서 몰아내고 조선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속셈이었다.
따라서 일본의 침략을 간파하고 척왜를 주창한 동학농민군을 일본은 제거대상으로 삼았다. 또한 조정내 친일파들은 오히려 동학군 학살에 동조했다.
조선 정부는 장위영 영관 이두황을 죽산부사로 임명하고 진천, 청주를 거쳐 농민군 본부가 있던 보은군 장내리를 치려고 했으나 농민군은 공주를 향해 떠난 뒤라 민가를 불태우고 나머지 농민군을 잡아들였다.
그때 농민군이 목천의 세성산에 진지를 구축했다는 정보를 받고 세성산으로 향하게 됐다.
일본군은 서울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마을을 습격해 농민들을 보이는대로 학살하다 마침내 목천에 이르러 11월18일 세성산 동학농민군 진지를 습격했다.
이때 이미(1894.10.27) 일본 히로시마대본영(전쟁총지휘본부=최고군사지휘부)은 ‘동학농민은 모조리 살육하라’고 명령했다.
세성산전투 1천여 농민 학살
천안지역 동학농민들도 일본군과 싸울 것을 결의하고 동절기를 대비해 9월말부터 인근의 전의, 천안, 목천에서 관아에 쳐들어가 무기와 식량을 확보하고 세성산에 진지를 구축했다.
11월18일 새벽. 일본군 대대장 미나미가 이끈 1천명, 마스키 대위가 이끈 1천명, 이두황이 이끈 관군 1만여명이 세성산의 동학농민군 진지를 기습공격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천안의 김화성, 목천의 김용희, 김성지의 농민군과 일본군은 18일 새벽부터 시작된 전투에서 혈전을 거듭했다.
농민군은 일본군에 비해 화력이나 전술력이 상당히 떨어졌으므로 1천여명이 희생당하고 세성산 서쪽으로 후퇴했다.
이 전투에서 빼앗긴 물품은 조총 1백40정, 탄환 2만5천5백개, 철환 36만6천개, 곡식 6백50여석이었다. 전투에서 끝까지 남아 항쟁하던 북접 효장 김복용과 중군 김영우, 화포장 원금옥은 다음날 일본군에 체포돼 총살당했다.
세성산 농민군이 보유한 무기는 화력이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반면 일본군은 신식무기로 무장했기 때문에 전투 실황은 농민군의 참담한 패배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천안시 성남면 화성리에 위치한 세성산(189m)은 지리적으로 청주와 공주를 위협할 수 있는 위치로 중요한 거점기지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세성산 정상에서 바라보면 사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러므로 정부군측에서도 이곳의 중요성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이곳을 막지 못하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전개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세성산 농민군 부대의 진압이 불가피함을 인정했던 것이다.
세성산전투 원혼의 통곡소리 아직도 들려
일본은 세성산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을 학살한 원흉이며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자행한 최초의 민중학살(Genocide)이다. 이 같은 일본군의 민중학살은 예산, 홍성, 결성, 당진, 면천, 덕산, 신창, 서산, 태안의 농민군 진지인 해미성 공격으로 이어졌다.
동시에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대규모 학살을 자행하고 호남과 남해안까지 방대한 지역에서 자행됐는데 농민군 사상자는 30만~40만명, 사망자는 5만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측된다. 그 중 세성산의 농민을 학살한 것은 최초의 학살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세성산의 형세는 북쪽 대부분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고 남쪽과 서쪽은 양지바른 구릉지형이다. 성의 흔적은 남았으나 동학농민전쟁 세성산 전투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농민전쟁 당시 성벽을 이용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1백89m 정상에는 봉우리를 덮을 정도의 거대한 바위가 놓여 있다.
이 자연석위에 올라가 주변을 관망하면 목천면과 병천면, 성남면 일대의 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당시 농민군 진지에 곡식을 쌓아 두었던 창고와 밥솥을 걸었던 구들이 남쪽 중앙 산기슭이었다는 주민들의 구술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농민들을 묻은 것으로 전해지는 골짜기는 계단식으로 지형이 형성돼 있다.
이 골짜기는 물이 많이 있어 시체를 그 물로 씻어 묻은 것으로 전해지기도 하는데 이름하여 세시당골이다. 비오는 궂은 날에는 골짜기에서 마을까지 통곡소리가 들린다는 말이 화성리 주민들의 구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당시 일본군한테 당한 농민군의 참혹함은 짐작할 만하다.
동학농민혁명 세성산전투에서 시작된 일본의 동아시아 민중학살은 조선의 독립투사와 의병학살, 관동대지진 학살, 중국남경대학살, 731부대 인간생체실험학살, 정신대 학살, 우키시마호 폭침학살로 이어졌다.
최근 일본이 과거 만행에 대해 그 피해국과 피해 당사자에게 사죄의 말 한 마디 없이 또다시 자위대를 전쟁터에 파병하려 하고 있다.
<자료제공 천안농민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