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농촌지역에는 가을의 상징인 풍성한 결실을 앞둔 황금물결이 펼쳐지고 있다. 금년엔 봄가뭄을 극복하기 위한 농민들의 땀방울이 그 어느 해보다 힘겨웠다. 그 땀의 결실이 이제 풍성한 수확을 앞두고 있다. 그러나 농촌지역은 더욱 침울한 분위기에 휩싸이고 있다.
올해는 극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사상 유례없는 폭설, 사상 유례없는 혹한, 사상 유례없는 가뭄, 사상 유례없는 무더위’ 농민들은 그 모든 상황을 극복하고 사상 유례없는 대풍을 기록했다.
이제 함박 웃음을 보일 때도 됐는데 농민들의 시름은 오히려 깊어지고 있다. 쌀의 공급과잉으로 인해 쌀값이 폭락할 것이라는 전망이 언론을 통해 곳곳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풍성한 수확과 넘치는 식량창고를 바라보며 모든 농민이 기뻐해야 하는데 반대로 농업붕괴의 위기가 감지되고, 불안에 떨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농업현실이다. 정부는 얼마 전 까지만 하더라도 쌀 증산을 독려했다. 그러나 이제는 농업의 풍성한 결실마저도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최근 5년연속 풍년과 우루과이라운드(UR) 농산물협정에 따른 의무수입량 증가, 식생활 변화에 따른 소비감소, 한정된 정부수매, 유통마진 축소에 따른 판로 불투명 등 쌀값 폭락은 정해진 수순이며, 최악의 시나리오로 가고 있다. 여기다 앞으로 3년 후 세계무역기구(WTO)와 쌀 협상을 벌여야 하는 정부를 농민들은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가.
취재기자는 지난 3월(토요시사 149호) 꽃샘추위가 매섭던 들녘에서 농민운동가 정진옥(49) 천안농민회 회장을 만났다. 그때 정 회장은 겨우내 쌓였던 눈이 채 녹지도 않은 싸늘한 들녘 논둑에 앉아 긴 시간동안 농업현실과 농민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었다.
“나라살림이 어려운 것은 농민이나 노동자의 탓이 아니다. 부도덕한 재벌·관치금융·어눌한 정부의 합작품이다. 풍요의 혜택은 그들이 다 누리고, 빈곤과 고통은 언제나 농민과 노동자들이 떠안아야 했다. 농민들은 단 하루도 편한 날 없이 힘겨운 삶을 살아왔다.”
이제 정 회장은 가을 들녘에서 삭발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 지난 겨울의 이야기를 반복했다.
<이정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