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7월 군자금 모금 중 치열한 저항 끝에 일본 헌병에 붙잡힌 채응언 의병장.
독립기념관(관장 김삼웅)은 국가보훈처, 광복회와 공동으로 의병장 채응언 선생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채응언은 1879년 평안남도 성천군의 가난한 농가에서 출생했다. 선생은 황해도 곡산으로 이주해 화전농으로 전전하던 중,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자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병부대에 투신했다.초기에는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다가 점차 능력을 인정받아 이진룡 의병부대의 휘하 부장으로 활약했으며 평안남도, 강원도, 황해도 등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1908년에 황해도 안평의 순사주재소와 수안 헌병분견소를 공격하고 함경남도 마전도 순사 주재소를 급습해 무기를 노획하는 등 혁혁한 성과를 거뒀다.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도 국권회복을 위해 의병활동을 계속해 김진묵 의병장의 부장으로 활약했다. 3∼4백명의 의병부대를 직접 이끌고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일대의 산악지대를 근거로 효과적인 유격전술을 구사했다. 특히 1913년에는 황해도 대동리와 선암의 헌병분견소를 기습해 일본군 헌병을 처단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또한 평남 성천 산악지대를 근거로 치열한 항일 게릴라전을 전개해 20명 이상의 일본 군경과 일제에 동조하는 세력을 처단했고 의병부대를 유지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적으로 매진했다. 이에 일제는 선생을 붙잡기 위해 ‘적괴 채응언수색대’를 조직하는 한편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1915년 7월에 부하를 이끌고 군자금을 받기 위해 평남 성천의 마을로 내려온 채응언은 지역주민의 밀고로 출동한 일본 헌병대와 치열한 육박전 끝에 붙잡혀 평양 형무소에 수감됐다. 선생은 살인 및 강도죄목으로 기소한 일본 법원에 불복해 조국광복을 위한 항일 의병투쟁이라고 당당하게 외치고 가혹한 일제의 탄압에 맞서 자살을 기도하는 등 법정투쟁을 계속했다. 이러한 선생의 기개에 놀란 일제가 사형집행을 서둘러 11월에 평양형무소에서 순국했다. 당시 언론에 선생이 붙잡힘으로써 의병전쟁이 종식됐다고 보도될 만큼, 선생은 주로 관북, 관서지역 접경지대를 중심으로 약 8년에 걸쳐 의병투쟁을 전개해 큰 성과를 거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이와 관련해 독립기념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고 관련 자료와 사진을 7월 한달동안 전시할 계획이다.■채응언 선생 공적내용 요약-1907 의병부대에 투신해 부장으로 활약-1908 강원, 함경, 평안도 등지에서 일본 군경 및 부일배 처단, 군자금 모금 등 활동 -1915 일제에 피체돼 순국 -1962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