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독립운동가 - 김 동 삼(1878.6.23-1937.4.13)
비타협무장투쟁 천명 등 강한 독립의지로 일생 바쳐“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일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한 일송 김동삼 선생이 마포감옥에서 옥중유언으로 남긴 말이다.김동삼 선생은 1878년 6월23일 안동에서 의성 김씨 가문의 한학자 김계락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학봉 김성일의 후예로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한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효과적인 국권회복을 모색하며 혁신유림으로 변모했다. 이상룡, 유인식 등과 함께 1907년 협동학교를 개설하고 대한협회 안동지회와 대동청년단에서 활동하는 등 전통 보수세력이 강한 안동에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경술국치 이후 1911년 서간도로 망명한 선생은 신민회 인사들과 함께 독립운동기지건설에 동참해 이주 한인의 정착과 교육을 위해 경학사와 신흥강습소 등을 조직했다. 1914년에는 항일무장투쟁에 대비해 독립군영인 백서농장을 설립하고 장주로 활동했다. 또한 만주, 러시아 일대 독립운동가 39인이 연서한 ‘대한 독립선언서’에 참여해 비타협무장투쟁에 의한 조국독립의 의지를 당당히 밝혔다.3.1운동 이후 민중들의 독립의지가 고취되면서 만주 이주자 수가 급증하자 서간도 일대에는 한족회, 신흥무관학교, 서로군정서 등으로 독립운동세력이 확대 개편됐다. 선생은 서로군정서 참모장으로 취임해 독립군 간부육성 및 국내진공작전을 수행하며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섰다. 또한 경신참변 등으로 독립운동세력이 와해되자 1922년 남만 통일회를 개최하고 대한통군부와 이를 확대한 대한통의부를 조직하며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기 위해 노력했다. 임시정부의 쇄신을 위해 1923년에 소집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선생은 서로군정서 대표로 참석해 의장에까지 선출됐다. 독립운동사상 가장 많은 수의 독립 운동가들이 한 곳에 모인 자리에서 그는 의장으로서 각 계파간의 의견대립을 조율하며 독립운동세력을 통합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창조파와 개조파간의 첨예한 견해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임시정부의 개조를 주장하며 만주로 돌아왔다.선생은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운동을 확대, 재정비하기 위해 1924년에 전만통일의회를 개최해 정의부를 조직하고 행정위원 및 외교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두 차례에 걸친 임시정부 국무원 취임권유도 마다할 만큼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및 통합운동에 매진했다. 또한 1927년에 정의부, 신민부, 국민부의 삼부통합운동을 추진하고 민족 유일당 재만책진회를 조직하는 등 만주지역 민족 유일당 운동에 앞장섰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북만주로 이주해 무장 항일투쟁을 위한 한중연합작전을 추진하던 중 선생은 하얼빈에서 일경에게 체포됐다. 평양 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37년 3월에 순국했다. 선생은 비타협 무장투쟁노선을 굳게 지키고 몸소 무장투쟁을 지휘해 ‘남만의 맹호’라는 별칭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동삼성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동삼’으로 개명할 만큼 국권회복을 목표로 사상과 이념을 초월해 독립운동단체의 분열을 막기 위해 노력한 통합운동의 선봉장이었던 것이다. 이에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주 요 공 적○ 1907 협동학교 설립 등 애국계몽 운동 전개○ 1911 경학사, 백서농장 등 만주 독립운동기지 건설 ○ 1919 서로군정서 조직 항일 무장 투쟁 전개○ 1923 국민대표회의 의장 ○ 1928 3부 통합운동 등 만주 독립운동계 통합 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