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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독립운동가 한성수(1920.8.18∼1945.5.13) 스물 다섯 피끓는 청춘 조국에 바쳐

스물 다섯 피끓는 청춘 조국에 바쳐

등록일 2005년05월03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 주요공적 ○ 1944. 3 광복군 제 3지대 입대 ○ 1944. 10 한국광복군훈련반 졸업 후 기간요원 활동 ○ 1944. 11 화남지역 책임자로 상해에서 공작활동 수행 ○ 1945. 5 법정투쟁 후 남경에서 순국 강제징집 탈출 독립군 투신, 일본형무소 법정 투쟁 중 순국“일본은 이번 전쟁에서 기필코 패전하고야 만다. 미·영·중·소 등 연합국의 합동작전으로 태평양 방면은 물론 인민전선과 중국전선에서 참패하고 머지않아 무조건 참패할 것이다. 그때 가서는 대한민국을 독립시켜 주지 않은 것을 후회할 것이며, 한국 독립군들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무수히 희생을 당한 것과 같은 고초를 침략자인 너희들도 당하고 말 것이다.” -한성수 선생의 군법회의 법정진술 중에서(1945.3)선생은 1920년8월18일 평북 신의주에서 태어났다. 평북 정주 일대에서 자선활동가와 오산학교 재단이사로 활동한 조부의 영향을 받아, 민족교육의 산실인 오산학교에서 수학했다. 이어 1941년 일본 전수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선생은 대학 재학 중 독립운동과 관련된 서적을 읽다 적발돼 정학을 당하는 등 학창시절부터 투철한 조국 광복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본은 조선인 학도병을 강제로 징집했다. 이에 선생도 1944년 1월에 학병에 징집돼 중국전선에 투입됐다. 선생은 중국 강소성 서주지역 학도병 최초로 탈출에 성공해 천신만고 끝에 중일전쟁의 최전방인 부양에 위치한 한국광복군 제 3지대에 입대했다. 선생은 광복군 제 3지대가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제 10분교에 임시로 설치한 한국광복군 훈련반에서 교육을 받았다. 졸업 후 중경 임시정부행을 택한 대다수의 동기들과는 달리 선생은 부양에 잔류해 제 3지대 기간요원으로 활동했다. 선생은 김학규 지대장에게 간곡히 요청해 상해를 중심으로 한 화남지역 공작책임자로 임명됐다. 이에 홍순명, 김영진 등과 함께 상해에 침투해 일대의 한인청년들을 모집하고 공작거점을 마련하며,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군자금을 요청하기 위해 상해에 거주하는 한국인 부호 손창식에게 접근한 선생은 1945년3월13일에 동지 7명과 함께 상해주재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됐다. 선생은 일본군을 탈출한 전력 때문에 더욱 잔혹하게 고문을 당했으나 끝끝내 한국광복군의 기밀을 누설하지 않았다. 당당하게 일본군 임시군법회의 법정에서 일본어 사용을 끝까지 거부하는 한편, 일본의 대동아 전쟁은 반드시 패할 것이며 한국 독립군들이 당한 희생만큼 침략자인 일본도 고스란히 당할 것이라고 질타했다. 선생은 일본 군법회의 재판정을 상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조국광복을 확신하며 법정투쟁을 벌인 것이다. 선생은 일본군 탈출 및 광복군 공작활동 등의 죄목으로 사형을 선도 받고 1945년 5월 13일에 남경주재 일본 육군형무소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스물 다섯 해의 짧은 생애를 조국광복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하다 순국하신 선생에게 정부는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이정구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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