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휘 선생 영정
4월의 독립운동가 성재 이동휘 선생(1873. 6. 20 ∼ 1935. 1. 31)■ 이동휘 선생 공적내용 요약○ 1907 강화진위대 동지와 의병봉기○ 1908 신민회 조직 등 애국교육운동 추진○ 1913 권업회 가담, 대한광복군정부 건립 추진○ 1918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 조직○ 1919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취임○ 1995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이동휘 선생은 함경남도 단천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성재다. 선생의 아버지 이승교는 연해주 대한인노인단 대표로 3·1만세시위에 참여하는 등 항일민족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인물이다. 선생이 평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집안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아버지의 소개로 18세 때 단천군수의 통인이 된 선생은 1895년에 한성무관학교에 입학해 신식무관교육을 받고 강화진위대장으로 근무했다. 선생은 1907년 일제의 구한국군 군대 강제해산에 분개해 강화진위대 동지들과 항일의병봉기에 나섰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을 전후해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했는데 그 방편으로 기독교를 수용하고 특히 구국좌·우익, 외교·무장 독립투쟁론 하나로 결집교육활동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에 강화와 평양 등지에 보창학교를 세우고 국학 및 근대학문과 군사교육을 병행해 구국인재양성의 요람으로 활성화시켰다. 또한 1908년에는 서북학회를 창립하는 한편 이동녕, 안창호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선생은 신민회를 탄압하기 위해 일제에 의해 조작된 105인 사건에 연루돼 또다시 투옥됐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1911년 가족과 함께 북간도로 망명한 선생은 간민회를 조직하고, 1913년에는 연해주로 거점을 옮겨 권업회에 참여하는 등 한인의 자치와 결속을 도모하고 국내에서 전개하던 애국계몽운동도 계속해서 추진했다. 아울러 망명이전부터 독립방법론으로서 실력양성론의 한계를 인식한 선생은 무장투쟁론을 구현하기 위해 대한광복군정부건립을 추진하고 독립군을 육성하기 위해 대전사관학교 등을 설립했다. 선생은 항일독립운동의 방법으로 사회주의를 접목시켜 1918년에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조직했다. 또한 선생이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에 취임함으로써 좌·우익노선과 외교독립론·무장독립투쟁론이 하나로 결집돼 상해 통합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총본부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중요한 발판이 됐다. 1921년 임시정부 요인들과의 갈등으로 국무총리직을 사임한 후, 선생은 고려공산당을 창립해 사회주의 혁명론에 입각한 민족해방운동을 꾸준히 전개했다. 선생은 공산주의 운동의 선구자로 두드러진 업적을 쌓았으나 궁극적으로는 항일민족독립운동의 방편으로 공산주의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적 혁명가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은 1935년 1월31일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서 63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이에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