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군위안부동원, 강제징용, 각종 수탈로 민중을 파탄으로 내몰았던 일제강점기. 일제강점의 총 본산인 조선총독부로부터 직위를 임명받은 면장. 그들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우리 역사에서 가장 지우고 싶은 뼈아픈 기억은 일제 강점기가 아닐까. 그러나 아직도 일제의 망령이 일선 관청에서 버젓이 위엄을 떨쳐 충격을 주고 있다. 민족 정기와 충절이 연상되는 천안시 동부지역에 위치한 성남면 회의실에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임명장을 받았던 3명의 면장사진이 걸려있다. 일본제국주의의 행정을 책임지던 그들이 성남면 1대∼4대(2대면장 누락) 면장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임명한 면장이 그들의 뒤를 이어 5대, 6대로 이어져 2003년 12월22일 임기를 마친 제20대 유제석 면장까지 연속선상에 있다.천안시의 한 관계자는 관행적으로 내려오던 것이기 때문에 굳이 문제삼을 필요가 있겠냐는 반응까지 보였다. 그에 따르면 성남면의 최초 설립시기부터 성남면 역사의 시작으로 보는 관점이 적절하다는 것이다. 역사적 기록에 근거한 명백한 사실관계만을 생각하자는 논리다.목천읍?병천면 일제면장 사진철거일제치하 면장사진에 대한 문제 지적은 이번뿐만이 아니다. 독립기념관이 위치한 목천읍사무소(구 목천면사무소) 회의실에도 2003년3월까지 5명의 일제시대 면장을 1대∼5대로 표기한 채 정돈돼 있었다.또한 아우내 장터와 유관순 열사의 숨결이 깃든 병천면 사무소에도 재임기간이 불분명한 1대∼3대 면장사진이 걸려 있었다.(4대면장 재임기간은 1950년이며 1∼3대 면장은 재임기간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해방 이전의 관료인지는 불분명) 당시 취재기자는 천안시 전역의 실태를 확인하기 위해 천안시 총무과에 조사협조를 의뢰했다. 당시 총무과에서는 일제시대 읍·면의 행정을 현 정부와 연속선상에 놓은 것은 문제가 있다고 인정했다. 따라서 읍·면별로 정확한 실태를 파악한 후 철거토록 하겠다고 공식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본보 2003년 3월22일 보도).그리고 목천읍과 병천면은 일제시대 면장사진을 철거한 것이 확인됐다. 그러나 성남면은 아직까지 그대로 보관돼 있는 상태다. 전국적으로도 천안시와 비슷한 사례가 많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목천·병천·성남 왜 이곳에?목천·병천·성남 공교롭게도 이 세 곳은 민족사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지역이다. 민족의 성지인 독립기념관이 목천읍에 위치해 있고, 병천면은 유관순 열사를 배출한 충절의 고장이며 독립만세를 외치던 아우내 장터가 위치한 곳이다. 성남면은 최근 천안농민회 등 사회단체에서 고증과 계승사업을 벌이고 있는 세성산전투의 격전지가 위치한 곳이다. 세성산 정상은 성남면 화성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줄기는 수신, 성남, 목천, 북면으로 이어졌고, 동학군 1천여 명이 일본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인 최초의 격전지로 알려진 곳이다.이에 대해 동학농민운동가 후손인 윤삼병(45·목천읍 신계리)씨는 “최근 종군위안부나 독도문제 등 거침없이 내뱉는 일본의 망언에 치가 떨리는데, 공직사회에서 문제의식조차 못 느꼈다는 점이 한탄스럽다”고 말했다.창씨개명, 황국신민화, 강제징용 앞장 서온 일제행정호서대학교 행정학과 남상화 교수는 행정체계가 같다고 일제시대를 대한민국 정부와 연속선상에 놓을 수는 없다며 크게 반발했다. 엄밀하게 따지면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를 1대로 지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보였다.(1945년 8월15일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공포는 1948년 8월15일)또한 남 교수는 “일제치하와 대한민국을 연속성으로 보는 시각 자체가 기막히고 놀라운 일”이라며 “대한민국 정부의 공직자들이 일제시대 행정을 그대로 인정한다는 사실이 매우 부끄러운 일”이라고 개탄했다. 이어 해방 이전과 이후는 행정의 역할과 기능도 확연히 구분된다고 말했다. 창씨개명과 황국신민화를 주창하던 일제관리가 해방 반세기 넘도록 그대로 인정됐다는 사실이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고. 향토학자인 백승명 직산위례문화연구소장은 “당시 민족의식이 강했던 관리들은 1910년 한일 합방 당시 대부분 관직을 버리고 낙향해 후진 양성과 민족교육, 독립운동에 투신했다”며 “일제 당시 관리들은 대부분 친일 성향이 강한 인물들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관리들은 주민들을 감시통제하고 일본제국의 식민정책을 주민들에게 전파하기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성무용 시장은 “일단 공직자들이 문제의식을 갖지 못한 점이 인정된다”며 “정확한 실태를 파악한 후 철거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