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독립운동가(김복한-1860.7.24~1924.3.29)명문가 출신, 고관직 버리고 항일운동 선봉선생은 충남 홍성군 갈산면에서 안동 김씨 봉진(鳳鎭)과 연안 이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원오(元吾), 호는 지산(志山)이며, 어려서부터 유학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선생의 12대 조부는 병자호란 때 순절한 우의정 김상용이고, 문과 급제자를 3명이나 배출한 명문가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선생은 일찍부터 민족과 국가를 위한 충절심이 남달랐다.선생은 비교적 늦은 시기인 31살 때 음직으로 관계에 진출한 이후 왕세자의 서연에 참여하고, 과거에 급제하는 등 정치적 입지를 크게 넓혔다. 주로 홍문관-승정원-춘추관 등 왕을 보필하는 직을 맡았으며,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한 시기에는 우부승지에 올랐다. 하지만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자 울분을 주체 못해 관직을 사직하고 낙향했다. 다음 해인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의 강요로 전국이 소용돌이치는 와중에 선생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 12월1일 이 설, 안병찬 등과 함께 홍주성에서 거병해 창의소를 설치한 것이다. 그러나 이 거사는 선생의 회유로 참여한 관찰사 이승우가 배반해 도리어 선생을 구속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선생은 서울로 압송돼 10년 유배형을 받았으나 광무황제의 특지로 석방됐지만 이 때 각기병이 생겨 보행이 매우 어렵게 됐다. 하지만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는 중차대한 위기에 처하자, 선생은 12월2일 이 설과 함께 상경해 일본 세력을 축출하고 왕실을 회복하자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구금된 선생은 낙향해 안병찬 등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유했다. 이에 1906년 5월 민종식을 의병장으로 한 의병 부대가 홍주성을 점령하는 쾌거를 일으켰으나, 끝내 홍주의병도 일본군에 의해 진압됐다. 이 때 선생은 다시 한 번 의병을 지원했다는 혐의로 구금돼 옥고를 치렀다.건강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유림들이 이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파리강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는 장서운동을 전개했다. 이때 영남유림들도 이를 추진한다는 사실을 알고 영남과 호서의 유림들이 연대해 연명한 파리장서를 만들어 보냈다. 이 장서운동으로 선생은 공주 감옥에 수감돼 3번째의 옥살이를 했다. 이같이 평생을 조선의 자주적 독립을 위해 몸을 바쳤던 선생은 끝내 건강을 잃어 1924년 3월 6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하지만 선생이 지역에서 유교 진작을 통해 ‘내수의 장책’을 마련하자는 취지에서 비롯된 유교부식회의 활동은 후에 윤봉길 의사와 김좌진 장군과 같은 걸출한 독립운동가를 탄생시킨 계기가 됐다. 따라서 선생은 구한말에서부터 일제강점기에 걸친 호서지역의 항일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라 할 수 있겠다. 이에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김복한 선생 공적내용 요약○ 1895 홍주에서 의병 봉기○ 1905 을사조약 반대 상소운동○ 1906 민종식의 홍주의병 지원○ 1919 호서유림 대표로 파리장서운동○ 1963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