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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의선 선생 (1889. 12. 8 ∼ 1931. 5. 6) 신구학문 겸비한 지성, 독립운동 투신

오의선 선생

등록일 2004년12월14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2.8독립선언, 임정수립 동참, 사회주의 운동가 활약상 두드러져선생은 1889년 경기도 용인에서 부친 오인묵과 모친 구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가풍에 따라 한학을 배우며 인격을 도야하고, 보성전문학교와 일본 메이지대학에 유학해 신학문을 수학했다.일본 메이지대학에 유학하던 시기 재일 조선인유학생 학우회에 가담해 활동했다. 그러던 중 동경유학생들이 중심이 돼 선포한 2·8독립선언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8독립선언 직후 중국 상해로 망명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경기도 대표로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돼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는데 동참했다. 나아가 세칙제정위원, 청원법률심사위원, 예산결산위원회 위원장 등으로 활약하면서 초기 임시의정원의 골격을 세우고 임시정부를 민족의 대표기관이자 독립운동 지도기관으로 만드는데 힘썼다.이후 1921년 북경으로 옮겨 무장투쟁론자인 박용만 계열의 인물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서북간도 및 노령지역 무장독립운동세력의 통일에 노력하고,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였다.1924년경에는 국내로 돌아와 「시대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사회주의 운동가로 변신했다. 더욱이 네 차례의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대거 피체돼 옥고를 치르는 상황을 목격하면서, 국제혁명자후원회의 국내 책임자가 되어 감옥에 갇힌 동지들과 그 가족들을 돕는 일에 앞장섰다. 그러다가 1931년 3월 향리인 용인에서 일경에 피체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심한 고문으로 같은 해 5월6일 옥중에서 43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이정구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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