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천학생만세운동에 참여했던 1백69명 명단이 새겨진 기념비.(목천초등학교 소재)
김소용, 이규태 학생 거사 주도, 임정 비밀문서에서 발견기미년(1919년) 3.1만세운동때 천안지역에서 제일 먼저 거사했던 목천 학생만세운동을 주동했던 중심인물이 밝혀졌다.천안향토사연구소 김성열(64)소장은 임명순(56)연구원과 함께 끈질기게 추적해 자료를 조사한 결과 상해임시정부자료집에서 그 오랜 숙제를 풀어냈다고 밝혔다.천안향토사연구소에서 밝혀낸 인물은 당시 목천보통학교에 재학중이던 김소용(당시 16세), 이규태(당시 19세) 학생이었다.3.14 만세운동 전말천안지역 만세운동을 전체적으로 배후 지원한 천안읍교회 안창호 목사는 병천교회 진명학교와 수신 장명교회 학교의 교사 김구웅 선생을 목천 및 병천지역 배후 지도자로 지명했다. 그 무렵 사회단체는 모두 해체되고 학교는 철저히 감시당하고 있었으나 교회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었다.당시 천안지역에서 가장 감시가 소홀했던 목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처음 거사를 하게 된다. 목천공립보통학교의 감시가 소홀했던 이유는 헌병파견대와 나란히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이 방심했을 것이라고 김성열 소장은 추측했다. 김구웅 선생의 지도를 받아온 병천 김소용 학생과 수신 이규태 학생은 당시 학생들이 처음보는 태극기를 그려 거사를 준비시킨다. 드디어 3월14일 마침내 1백79명 전교생들은 태극기를 손에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일제에 억압됐던 울분을 토한다.거사 당일까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던 일본인 교사와 지역 친일 유지들은 놀라운 거사에 당황한 일제 순사들과 같이 시위 학생들을 해산시켰다.이규태, 김소용 학생은 계속되는 심문조사에서도 배후 조종자를 발고하지 않고 함구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것은 지도교사 김구웅 선생이 4월1일 병천 아우내장터 만세거사까지 들키지 않고 감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김구웅 선생은 아우내장터에서 순국하고 만다.이후 이규태(목천초 4회 졸업) 학생은 상해임시정부에 가담하고 김소용(목천초 5회 졸업)학생은 감시받는 몸으로 농사일을 해가며 교회에서 봉사활동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한편 목천초등학교 운동장에 설치된 기념비에는 만세운동에 가담한 1백69명의 학생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이규태 학생이 상해임시정부에 보고한 내용에는 1백79명으로 기록돼 있어 나머지 10명의 소재에 대해 천안향토사연구소에서 추적 조사 중이다.후손들에게 독립유공 포상추서천안향토사연구소 김성열 소장은 김소용 학생의 이후 소재를 추적한 결과 손자인 김기동(32)씨를 찾아냈다. 김기동씨는 조리학과에 진학한 후 조리사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어려운 경제여건으로 미취업 상태며, 현재 안산시에서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전했다.또한 이규태 학생은 28세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등져 직계자손이 없고, 막내 동생인 이상욱(70)씨가 현재 천안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이상욱씨는 서여자중학교에서 교장으로 재직한바 있다. 이에 천안향토사연구소는 김기동씨에게 취업 등 향후 진로를 주선해 줄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한 정부에 김기동씨와 이상욱씨를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추서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