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연 선생 인물 초상화.
장지연 선생 (1864∼1921) 대한자강회 창립, 국채보상운동 주도 등 항일운동 선봉#장지연 선생 공적내용 - 1898 황성신문 창간- 1905 「시일야방성대곡」으로 항일 독립정신 촉발- 1906 대한자강회 조직, 국권회복운동 전개- 1910 국학연구로 민족의식 고취- 1962 건국훈장 독립장 수여장지연 선생은 1864년 경북 상주에서 부친 장상용과 모친 유씨 사이의 독자로 출생했다. 조선시대 예학의 대가 가운데 한 분인 장현광의 12대 후손인 선생은 어려서 장석봉에게 유학을 공부하고, 이후에는 의병장으로 이름 높은 허 위의 형인 허 훈 문하에서 수학했다.허 훈은 기호남인으로 실학의 대가인 성호 이익의 학문을 계승한 허전의 제자였으므로, 선생은 심성·예학을 중시하는 영남유학과 현실 개혁을 중시하는 기호남인의 실학을 겸비했던 것이다.1894년 초시에 합격한 뒤 1896년 상경한 선생은 새로운 인물들과 만남을 통해 사상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즉, 서구열강을 금수로 보았던 종래의 화이론적 척사관에서 서구열강도 의리를 아는 국가이므로 무조건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대외관으로 변화했던 것이다.특히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 그리고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경험하면서 국가 위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해결방안을 찾았고, 결국 성호학파계열의 실학과 자신의 사상을 접목시켜 진보적인 개화사상가이자 개신유학자로 거듭나게 됐다. 그리하여 1898년 황성신문 창간에 참여하고, 1899년 시사총보의 주필로 계몽적 언론인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이후 선생의 언론을 통한 애국계몽활동은 1902년 황성신문 주필 겸 사장으로 전성기를 맞았고, 1905년 11월 일제의 을사조약 강제 체결을 통렬하게 비판해 민족의 독립정신을 촉발한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표출되었다. 이 논설로 선생은 일제 헌병대에 피체돼 4개월간 고초를 겪었지만, 선생의 독립의지는 결코 꺾이지 않았다.그것은 일제의 압력으로 황성신문 사장을 사임한 뒤에도 1906년 국권회복운동 단체인 대한자강회의 창립과 1907년 국채보상운동 등을 주도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더 나가 우리의 강역과 역사를 다룬 고전들을 발간하고, 몸소 역사 연구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정신을 배양하며 민족의 실력을 양성해 갔다.이 처럼 일제로부터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선생의 노력은 경술국치 이후에도 계속됐다. 하지만 시대적 격변과 망국의 비운을 체험하면서 울분에 쌓여 병을 얻었던 선생은 1921년 11월1일 마산 자택에서 57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