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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 천안 독립기념관에서도 본다

‘광개토대왕비’

등록일 2004년10월23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좌측부터 중국지린성 광개토대왕비 원본, 독립기념관에 재현된 광개토대왕비 중국 지린성 원비 1천8백여자 비문 재현, 10월 26일 제막교과서를 통해서만 접해왔던 고구려 전성기, 중국왕조를 압박하며 독자적인 세계관을 자랑하던 광개토대왕의 위대한 기상을 간직한 ‘광개토대왕비’를 독립기념관에서도 볼 수 있다. 독립기념관(관장 김삼웅)은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시(集安市)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의 원래 모습대로 3년에 걸친 건립 공정을 끝내고 독립기념관 겨레의 큰 마당에 재현해 오는 26일(화) 오전 11시에 제막식을 갖는다고 밝혔다. 근대 이후 광개토대왕릉비는 온갖 수난을 겪어 왔다. 우선 19세기 말 발견 당시부터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개입했다. 일제가 침략적 관점에서 연구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이다. 선문대학교 대학원장 이형구 교수는 “허구적인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제시되었고, 참모본부에 의한 비문 변조설은 아직까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며 “거기다 현행 일본 역사교과서에 고대사 왜곡의 희생양으로 사진까지 버젓이 게재돼 있는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뿐만 아니라, 최근 중국은 ‘일사양용(一史兩用)’이라는 해괴한 논리로 광개토대왕릉비를 포함해 고구려의 왕릉과 고분을 자기네 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 등록시켰다. 그러면서도 한국의 학자와 관광객의 접근을 의도적으로 차단하는 모순된 행태를 보이고 있다.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에 의한 한국사 침탈의 일환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 현지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가 재현되었다는 것은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광개토대왕비가 독립기념관에 건립되기까지광개토대왕비 건립사업은 계룡장학재단(이사장 이인구)이 접근성이 어려운 광개토대왕비를 국민들에게 역사교육 자료로서 관람의 편의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민족문화유산으로 멸실될 가능성을 우려해 비의 건립을 추진했다. 이후 건립 장소를 물색한 끝에 2001년 12월11일 독립기념관과 건립 조인식을 갖고 공사를 시작한지 3년만에 완공을 보게된 것이다. 이 비의 건립은 매우 치밀하면서도 어려운 과정을 거쳤다. 우선 원비와 같은 석재를 중국 현지에서 찾아내 국내로 반입했고, 이형구(선문대학교 대학원장) 교수가 정탁본을 모본으로 삼아 자체와 자형을 고증하고 각자(刻字)를 위한 원고 작성까지 담당했다. 비문의 글자를 새기는 작업은 중국인 석공(15명)까지 동원해 일체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정과 망치만을 이용하는 수작업으로 새겼다. 원비와 같은 효과를 내기 위해 비면에 화공 약품을 이용해 인공 풍화작용 과정을 거치는 등 원비에 최대한 근접하기 위한 노력을 다했다는 것이 독립기념관측 설명이다.광개토대왕비 복원의 역사적 의미일각에서는 독립기념관에 세워지는 복제비가 중국에 있는 원비와 일부 다르다는 견해를 보이기도 했다. 지난 21일(목) 연합뉴스는 우석대 조법종 교수(한국고대사)의 말을 인용해 “사진으로 볼 때 머리 부분 등 전체적 모양에서 광개토대왕비의 웅혼한 느낌을 주지 못하고 있다”며 “원래 비는 자연석을 큰 가공 없이 사용했으며 아래, 윗 부분에 비해 가운데가 약간 들어간 모습인데 재현 비는 거의 일자형으로 밋밋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독립기념관 기획조정실 김용주씨는 “실물과 같을 수는 없지만 원형에 가까운 비를 제작하려고 최대한 노력했다”며 “고구려사에 대한 교육적 가치가 우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용주씨는 “민족의 웅비를 상징하는 광개토왕릉비를 독립기념관에 재현한 것은 독립정신과 고구려인의 기상이 정신사적 맥락을 같이 하기 때문에 특별한 의마가 있다.”며 “우리 민족사를 왜곡하는 주변국가들의 논리가 허구적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밝혀 줄 것이고, 국민들에게 민족사의 계통을 명백히 정립하게 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이 비는 계룡장학재단이 독립기념관에 기부채납하는 형식으로 기증돼 독립기념관 겨레의 큰 마당에 영구 전시된다.광개토대왕은 누구?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제19대 왕으로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란 시호(諡號)처럼 영토를 널리 개척하고 백성들을 평안하게 해준 왕이었다. 뿐만 아니라,‘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중국 왕조와 대등함을 표방했고, 독자적인 천하관을 지닌 왕조임을 천명한 왕이었다. 광개토대왕은 안으로는 북방 세력의 남하를 저지해 민족의 방파제 역할을 했고, 밖으로는 중국과 동아시아의 패권을 다투며 고구려 전성기를 이룩한 태왕(太王)이었다. 6.4m의 거대한 광개토대왕비의 4면에 새겨진 1천8백여자의 비문은 이같은 고구려의 역사적 사실을 잘 알려주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이정구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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