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독립운동가 / 조시원(趙時元) 선생광복군 창군, 잡지 ‘진광’ 발간, 해방 후 건국운동까지 맹활약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 광복회와 공동으로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한 조시원(趙時元) 선생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선생은 1904년 경기도 양주에서 부친 정규공과 모친 박씨 사이에 7남매 중 6남으로 출생했다. 선생의 부친은 학덕을 겸비하고 신망이 높은 유생으로 슬하의 자녀, 손자, 손녀, 자부 등 일가족 10명을 독립운동가로 키웠다. 특히 선생은 독립운동을 위해 일찌감치 망명한 형(용하 소앙 용주)들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성장했다. 1920년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망명한 선생은 상해남방대학 역사사회학과에서 수학하면서 독립운동의 이론을 정립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1927년에 김무정 등과 함께 중국본부 한인청년동맹 상해지부를 결성하고 정치문화부장 겸 선전조직부장으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중국본부 한인청년총동맹을 창립해 중앙위원장에 취임, 중앙본부 및 각 지부 간부를 총지휘했다. 1928년 한국에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 창립에 참가했으며, 이후 만주로 진출해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장군과 동만청년동맹을 조직, 무장투쟁에도 참여했다.선생은 1929년 북경에서 다물단에 가담, 친일주구배 숙청공작을 전개하고 이듬해 상해에서 화랑소년회를 조직·지도했으며, 통일전선인 한국광복군에도 참여했다. 1933년 한국독립당에서 중국 서안에 특파원으로 파견돼 한·중 연합 항일운동 근거지건설에 관한 교섭을 전개했다. 1935년 조소앙, 홍진 등과 함께 잡지 ‘진광’도 간행했다. 1938년 10월 임시의정원 의원 겸 비서장으로 선임되고 11월에는 임시정부 선전위원, 특파원, 선무단장 등으로 임명돼 입법과 행정 양면에서 눈부신 활약을 전개했다. 1940년 광복군 창군에 참여한 선생은 총사령부 부관에 임명됐고, 총사령부가 서안으로 이전하자 현지에서 부관처장 대리로 복무했다. 이듬해 중국 중앙전시간부훈련 제4단 특과총대학원대 한청반의 교관으로 전술, 역사, 정신교육을 담당했다. 1942년 광복군총사령부 법무처장, 정훈처장, 특파원 등을 역임했으며, 광복군 정령으로 복무하면서 본토 상륙작전을 준비하던 중 광복을 맞아 1945년 12월 임시정부 제2진으로 환국했다. 환국 뒤에도 국민의회 대의원 겸 법무위원, 전재동포원호회 상무위원, 국민회 중앙상무위원, 삼균주의청년동맹 부위원장, 김상옥열사기념사업회 이사, 후생협회중앙본부 상무위원, 태양신문사 고문 등을 맡아 건국운동에 진력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