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도 기자실 논란이 갈수록 태산입니다. 기자실 이용 문제로 촉발된 다툼이 출입기자들간 ‘쌍방고소’(폭행혐의와 모욕죄 혐의)로까지 확산됐습니다.
충남도 일부 기자단은 자신들을 ‘정의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듯합니다. 이들은 또 다른 충남도출입기자단의 등장에 ‘사이비 기자’의 출현을 염려합니다. 그래서 기자실도, 운영방안 에 대한 논의도 자신들이 독점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가 쓴 <정의란 무엇인가>는 한국에서만 100만 권 이상이 팔렸습니다. 그만큼 정의가 목마른 시대라는 역설로 들립니다.
‘기자’는 자신의 몸 속에 정의의 불을 밝히는 직업인입니다. 샌델의 책에 등장하는 공리주의자인 제레미 벤담이나 존 스튜어트 밀이 살아있다면 지금의 충남도 기자실 논란에 대해 어느 쪽이 정의롭다고 평할까요? 물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상가들이 이런 좁쌀만한 일에까지 개입하고 나서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논의 조건은 50여 명이 사용할 수 있는 기자실 공간을 20여 명의 일부 기자단이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벤담과 밀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기준점으로 제시했습니다. 가급적 많은 사람에게 가급적 많은 행복(쾌락)을 주는 일을 올바른 행동이라고 판단했죠. 때문에 두 사상가는 일부 기자들이 기자실을 독점하는 것보다 좀 더 많은 기자들과 공간을 공유했을 때 사회적 행복의 총합이 커진다고 볼 가능성이 높습니다. 20명보다는 50명의 기자들이 공간을 공유하는 쪽이 양적, 질적으로 행복도가 높다고 평가했을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고 말한 ‘임마누엘 칸트’는 도덕적 양심을 강조한 인물입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다른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로 다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기자실을 독점하고 있는 기자단은 자신들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기자실을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도민들에게 알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한 모든 언론인들의 공간을 독점하는 일을 관행(수단)을 내세워 정당화했습니다. 칸트가 살아 이 상황을 지켜본다면 어느 쪽에 먼저 손가락질을 했을지는 자명합니다.
‘정의론’을 쓴 존 롤즈 또한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등장하는 주요 등장인물 중 한 명입니다. 그는 ‘각 개인은 기본적으로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말합니다. 또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차등 조성의 원칙)은 기회가 적은 소수자를 만족(기회의 균등)시켜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기회를 균등하게 하려면 소수자인 여성이나 장애우, 소수인종들을 배려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충남도 출입기자 모두는 기자실 공간을 이용할 권리가 있습니다. 지금 기자실을 독점하고 있는 기자단은 배려와 혜택을 받아야 할 소수자도 아닙니다.
‘목적론적 존재론’을 주창한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자실이 왜 존재하는가’를 물었을 공산이 큽니다. 기자실은 도민들에게 알권리를 잘 전달하기 위한 소통을 위해 존재하는 만큼 이에 가장 부합하는 탁월한 선택이 무엇이냐고 되묻지 않았을까요? 사람들마다 답변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일부 기자들이 소통공간을 독점하는 것이 기자실 존재이유에 가장 적합하다’고 사고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 벤담과 밀, 칸트, 롤즈의 정의론을 ‘개인주의’라고 비판했던 샌델 교수는 어떻게 답변했을까요?
샌델은 책을 통해 ‘개인의 권리’보다는 ‘공동체’가 우선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공동체의 목적을 놓고 민주적 토론을 통해 도덕적 선(미덕)을 합의해 내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습니다.
몇 달간의 논란 끝에 두 기자단과 충남도, 기자협회, 시민단체인 대전충남민언련은 지난 3일 3개항에 합의했습니다. 하지만 대전충청세종기자협회와 일부 기자단은 하루만에 ‘대전충남민언련을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번복했습니다. 토론회를 통해 합의점을 찾자는 제의 또한 거절했습니다. 굳이 샌델의 예상 답변을 추론하진 않겠습니다.
결국 <정의란 무엇인가>에 등장하는 모든 이가 도청 기자실 독점은 ‘정의롭지 않은 일’이라고 평했을 것입니다.
부연하자면 출입기자들 속에는 사이비 기자가 속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설령 사이비 기자가 있다 하더라도 기자실 독점과는 별개입니다. 롤즈의 논리를 빌리자면 기자실 이용계약은 누가 사이비 기자인지 알 수 없는 원초적인 ‘무지의 베일’ 상태에서 맺어질 때 평등합니다. ‘사이비 기자는 도청기자실을 출입해서는 안 된다’? ‘도청 출입기자 중에는 사이비기자가 있다’ ? ‘때문에 기자실은 일부 기자들만 사용해야 한다’는 어설픈 3단 논법은 궤변일 뿐입니다.
도민들은 충남도청 기자실 논란을 접하며 어떤 생각을 할까요. 기자들도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불완전한 인간들일 수밖에 없구나 하는 이해심일까요? 기자들에게서도 정의를 찾을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에 씁쓸해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