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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의 뛰어난 전략가 염온동 선생(1898. 5. 1~1946. 1. 24)

2010년 4월의 독립운동가

등록일 2010년04월06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염온동선생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광복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한 추정(秋汀) 염온동(廉溫東) 선생을 2010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독립기념관은 4월 한달간 독립기념관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에서 선생의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개최한다. 이 자리에서는 선생과 보성전문학교 사진 등 자료 14점이 공개될 예정이다.

염온동 선생은 1898년 5월1일 강원도 금화군 읍내리에서 태어나 1910년 금화군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보성전문학교로 진학했다. 보성전문학교에 재학 중 독립운동에 관여하는 인물들과 교류한 선생은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됐고 1919년 금화지역의 3·1운동에 참여해 3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선생은 독립을 위해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1921년 4월 상하이로 망명, 독립운동단체에 참여해 관련 인물들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의 기반을 넓혔다.
그 결과 1923년 2월 제11회 임시의정원 의회에서 강원도 출신 의원으로 선출돼 임시정부의 다양한 활동에 참여했으며, 1926년 7월에는 안창호·엄항섭 등과 함께 경제후원회를 조직해 애국금을 납입하는 등 임시정부의 경제적 후원에 앞장섰다.   

1920년대 중반, 중국 관내에서는 독립운동 진영을 통일해 일제의 침략에 맞서 투쟁하고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됐다.
상하이, 광저우 등지에서 유일당 결성을 위한 촉성회가 조직됐고, 1927년에는 각지 촉성회연합회가 결성됐다. 이 때 선생은 이 연합회의 전위단체인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의 중앙집행위원과 상하이지부의 대표로 선출돼 한인독립운동진영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1940년 임시정부는 약 8년간의 이동을 끝내고 충칭에 정착했다. 임시정부는 정착 후 조직과 체제 및 대일항전태세 강화에 전력을 다했고, 그 결과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선생은 1944년 6월 임시정부 군무부 총무과장, 군무부 군사학편찬위원회 간사로 근무하며 한국광복군과 관련된 각종 군사학 서적을 편찬하며 한국광복군의 기반 구축에 열정을 바쳤다. 

1945년 4월 선생은 다시 임시의정원 강원도 출신의원으로 보선돼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과 위상강화, 광복 후 임시정부의 여러 가지 후속 처리방안을 위해 노력했고, 광복된 조국으로 환국하지 못한 채 1946년 1월 24일 이역만리 충칭의 차디찬 벌판에서 숨을 거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정리/이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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