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92년 12월에 결혼하고 다섯 달도 안 돼 남편과 떨어져 살기 시작했어요. 혼인신고를 하고 나서야 남편이 외도를 했고 저도 몰랐던 딸이 하나 있다는 걸 알았어요. 임신했다는 걸 알았을 때는 낳아야 할까 고민도 했지만 어른들의 잘못 때문에 생명을 지울 순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벌써 17년 전이네요.”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은 이창순씨는 낮은 목소리로 차분히 가슴속의 응어리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출산 후 일주일이 지난 다음부터 언니 식당에서 일을 돕기 시작했어요. 아기는 거의 식당 카운터에 놓고 키우다시피 했죠. 미용실도, 식당도 해보았는데 이런 저런 악재로 끝내 빚더미에 앉게 됐어요. 나중에 친구랑 동업을 하다가 상처를 받은 뒤에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며 정신과 진료를 받고 약을 입에 달고 살았던 때도 있었답니다.”
17년간 모자가장으로 홀로 아들을 키워오며 갖은 풍파를 겪어온 창순씨지만, 그 전의 삶도 결코 평범하지만은 않았다.
딸이 넷인 집에서 셋째로 자란 그녀의 큰 언니는 척추장애가 있었고, 다른 언니는 혈압으로 쓰러져 시신경 마비가 된 후 시각장애인이 됐다. 동생은 루푸스를 앓아 피부가 괴사되고 관절을 못 쓸 정도로 합병증이 진행돼 현재 지체장애인이다. 어머니는 2004년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은 뒤 2번이나 큰 수술을 받았지만 현재 거의 거동도 하지 못하는 상태로 구성동 평안의 집에 입소해 있으시다.
이씨는 지금도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자리잡고 사는 모습을 보여드려, 더 걱정 안하고 편하게 보내드릴 수 있다면 바랄 것이 없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아들이 닮고 싶어하는 엄마가 됐으면…
몸무게는 50㎏도 안 되고 약 없이는 열흘이고 스무날이고 잠을 못 자던 시절. 보다못한 언니와 형부는 이씨의 살림을 모두 정리하고 천안으로 모자를 데리고 내려왔다.
그랬던 그녀를 흔들어 깨운 것은 결국 아들이었다.
어느 날 엄마가 잠을 자고 있는 것으로 안 아들은 “엄마가 제발 약을 끊었으면 좋겠다”며 머리맡에서 기도를 했다. 당시 중학교 2학년이던 아들의 기도를 들은 엄마의 감은 눈에서는 눈물이 멈출지 몰랐다. 이후 이씨는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 한 번 일어나리라 다짐한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정보나 기관을 알아내면 몸이 힘들어도, 부끄러워도 피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올 1월에는 ‘천안여성의 전화’를 찾게 됐다. 특히 이곳의 미혼한마음가족지원팀은 이씨에게 커다란 힘이 되 주었다. 신용회복위원회를 거친 그녀는 구청의 지원으로 한식조리사, 양식조리사, 복요리조리사 자격증도 따냈다.
“가족이라고는 저 밖에 없잖아요. 아들이 나를 보고 커야 하는데…. 우리 아들이 나중에 엄마를 닮고 싶다는 희망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요리할 때 처럼 행복할 때가 없다는 그녀는 앞으로 조그만 밥집을 하나 경영하면서 나중에 ‘장(醬)’과 관련한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다른 모자가정에 동기를 부여해 주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그녀의 최종 목표다.
“사랑한다, 아들아”
지금껏 아들을 혼자 키우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역시 경제적인 부분이다. 이씨는 ‘아직도 아이가 갖고 싶어하는 최소한의 것도 못해주고 있다’며 미안해 한다.
운동에 소질이 있었지만 태권도를 빼고는 뭐 하나 뒷바라지를 해준 게 없다. 태어나서 지금껏 아빠 얼굴 한 번 본적이 없는 아들이, 너무 일찍 철이 든 아들이, 공부를 잘 하지는 못하지만 듬직하게 자라준 아들이 그저 애틋하기만 하다.
“아들아. 엄마 주변 가족들 다 아프고 힘든데, 그래도 웃으면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바로 너 하나 뿐이야. 앞으로도 남들에게 베풀고 사랑을 주는 아이로 자라주길 바래. 내 몸을 빌어 태어나 준 것 자체가 너무 고맙다.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