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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정예간부를 양성한 ‘명조련사’ 이종희 선생

2009년 9월의 독립운동가

등록일 2009년09월08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이종희 선생
독립기념관은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남정(南亭) 이종희(李鍾熙) 선생을 2009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9월 한달간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제5·6관 통로)에서 그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개최한다.
여기에는 의열단·조선의용대·한국광복군·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한 당시 사진 등 관련 자료 20점이 공개될 예정이다.

이종희 선생은 1890년 4월19일, 전라도 금구현(金溝縣) 귀미란 마을(현 전북 김제시 금산면 용호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남정(南亭)이고, 독립운동 초기에는 이인홍(李仁洪)이라는 이름을 쓰다가, 1926년 이후부터는 이집중(李集中)이라는 이름만을 사용했다.
고향에서 청년기를 보낸 선생은 1919년을 전후해 중국으로 망명하면서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망명 후 선생은 대표적인 의열단체로 일제 식민수탈기구의 파괴와 일본 고위관리나 친일파의 처단을 활동목표로 하는 의열단에 정식단원으로 가입해 의열투쟁에 동참했다.
1925년 북경에서 유자명의 지시로 일제의 밀정 김달하(金達河)를 처단한 선생은 이후 의열단의 독립운동 노선전환에 따라 1926년 1월 광주(廣州)로 이동해 10여 명의 의열단원과 함께 황포군관학교 제4기 보병과에 입학했다. 재학 중에 선생은 재광동조선혁명군인회와 유월한국혁명동지회에 참여해 활동했다. 1926년 10월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 소위로 임관한 선생은 남창 주둔 중국군 부대에 배속돼 근무하면서 의열단 남창지부원으로 활동했다.
1932년 남경으로 근거지를 옮긴 의열단은 혁명간부 겸 항일투사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를 설립했다.
선생은 이 학교의 교관으로 근무하며 한인청년 사관 양성에 힘썼다. 조선혁명간부학교 운영으로 다수의 청년투사를 양성해 조직의 위상을 재확립하고 항일운동 역량을 강화하는데 성공한 의열단은 1933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된 대동단결체 결선운동을 주도해 1935년 7월 중국 관내의 민족유일당으로서 민족혁명당 창립을 이룰 수 있었다.
선생은 1937년 민족혁명당의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며 김원봉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이끌어 갔다. 그리고 1938년에는 조선혁명간부학교 졸업생을 포함한 100여 명의 정예요원으로 구성된 조선의용대 창설에 참여해 총무조장에 임명됐다.
선생이 참여했던 조선의용대는 직접적인 항일전을 위해 화북지역으로의 이동을 결의하고 1941년 초 황하를 건너 태항산 일대로 이동했다. 그 후 조선의용대의 잔류 병력과 본부 요원은 1942년 12월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됐는데, 이 때 선생은 제1지대 총무조장으로 임명됐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조선의용대의 한국광복군 편입을 이룬 직후 민족혁명당의 참여도 추진했다. 그 결과 1942년 제34차 임시의정원 의회에서 선생은 민족혁명당 소속의 전라도 출신 의원으로 당선됐다.
1943년 김원봉의 후임으로 한국광복군 제1지대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던 선생은 폐병을 얻었다. 중경(重慶)은 양자강과 가릉강(嘉陵江)이 만나는 지역이면서 분지지대로 1년 내내 안개가 끼는 고온다습한 날씨다. 이런 기후 탓에 우리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들은 폐병을 앓고 아까운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병상에서 광복을 맞이한 선생은 1946년 4월29일 환국하는 배를 타고 부산항에 도착해 검역과 상륙 수속을 기다리던 중 광복된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선상에서 눈을 감고 말았다.
1977년 정부에서는 고인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정리/이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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