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익 선생.
독립기념관은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남파(南坡) 박찬익(朴贊翊) 선생을 2009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8월한달간 독립기념관 야외특별전시장(제5·6관 통로)에서 그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개최한다.
여기서는 선생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주화대표단장으로 활동할 당시 사진 등 관련 자료 25점이 전시될 예정이다.
박찬익 선생은 1884년 1월2일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904년 관립공업전습소 등에 입학해 신학문을 익히고 신민회의 청년단체인 청년학우회를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대종교에 입교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했다.
1911년 2월 중국 만주로 망명한 선생은 경학사·신흥강습소·간민교육회 조직 등 만주지역 독립운동기지 개척과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다. 1919년에는 대한독립의군부 창설에 참가해 총무 겸 외무총장으로 활동했고, 대한독립선언서의 서명자 중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선생은 1919년 4월 23일 발표된 한성임시정부의 평정관(評政官)으로 선출될 만큼 당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서 그 위상을 인정받았다.
1921년 상하이로 건너간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업무를 시작하였다. 그는 신규식과 함께 쑨원(孫文)에게 임시정부의 승인과 원조를 요청했고, 봉천 군벌과 외교교섭을 벌여 만주지역 한인 동포들의 처우개선을 위해 힘을 쏟았다. 임시정부의 이동시기에는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자싱(嘉興), 항저우(杭州) 등지로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도록 중국 정부와 교섭했다.
선생은 1940년 9월 한국광복군 창설에 기여하고 10월부터는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법무부장으로 선출됐다. 1942년에는 좌우합작정부 수립에 공헌했고, 한중 양 민족의 합작을 목적으로 중한문화협회를 결성하는 등 민간 문화 분야까지 방대한 활동을 펼쳤다.
광복 후 선생은 환국하는 임시정부를 대신해 조직된 주화대표단(駐華代表團) 대표로서 혼란스러운 동포사회를 안정시키고 그들의 귀국을 돕는 일을 처리했다.
1948년 김구가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만류하기 위해 급히 귀국한 선생은 건강이 악화돼 이듬해인 1949년 3월9일 서거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정리/이진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