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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의 부인이었던 박자혜 선생

2009년 7월의 독립운동가 (1895. 12. 11 ~1944. 10. 16)

등록일 2009년07월08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박자혜 산파소’의 모습. 원안이 박자혜 선생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박자혜(朴慈惠) 선생을 2009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박자혜 선생은 1895년 12월 11일 경기도에서 중인 출신인 박원순의 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궁궐에 들어가 약 10년 간 견습나인으로 생활한 그녀는 1911년 숙명여학교 기예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다시 사립 조산부 양성소에서 과정을 마친 후 조선총독부의원 산부인과 간호부에서 근무했다.
1919년 3·1운동이 시작돼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일제는 총탄을 발포하는 등 만세운동을 야만적으로 진압했고 각 병원에는 부상자가 끊이지 않았다. 조선총독부의원에서 부상자들을 치료하면서 민족적 울분을 느낀 선생은 함께 근무하던 의사, 간호사들에게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주장하며 간우회(看友會)를 조직했다. 선생은 간호사들과 동맹파업을 준비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으나 풀려난 후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 펑티엔(奉天)을 거쳐 베이징(北京)에 도착한 선생은 옌징대학(燕京大學) 의예과에 입학했다. 선생은 1920년 4월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이 베이징으로 오자 그를 소개받아 가정을 꾸리고, 남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독립운동가 아내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1922년 고국으로 돌아온 선생은 인사동에 ‘박자혜 산파’라는 산파소를 열고 가족의 생계를 담당하는 한편, 중국에 있는 남편 신채호와 계속 연락을 주고받으며 독립운동가들의 연락임무를 지원했다. 1926년에는 서울지리가 생소한 나석주 의사를 도와 사전에 길을 안내하는 등 나석주 의사의 의거가 성공리에 추진될 수 있도록 힘을 보탰다. 

1928년 4월 신채호가 일경에 붙잡혀 중국 뤼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르자 남편의 옥바라지까지 도맡았던 선생은 1936년 신채호가 옥중 순국한 지 8년 만인 1944년 병환으로 서거했다.
정부는 독립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의 아내로서 독립운동을 후방에서 적극 지지·후원한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독립기념관은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자 7월 한달간 독립기념관 제1전시관 출구에서 그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개최한다. 여기서는 박자혜 선생과 남편 신채호 선생의 결혼기념사진 등 관련 자료 14점이 전시될 예정이다.
<정리/이진희 기자>

선생과 남편 신채호 선생의 결혼기념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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