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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독립운동가 윤병구 선생(1880. 12. 22 ~ 1949. 6. 20)

미주지역 민족독립운동 주도한 대한인국민회 회장

등록일 2009년06월03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1900년대 초 구국외교활동을 전개할 당시의 윤병구 선생.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윤병구(尹炳球) 선생을 2009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6월 한달간 독립기념관 제1전시관(민족전통관) 출구에서 그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개최한다.
여기서는 샌프란시스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조직된 임정대표단 등 관련 자료 20점이 공개될 예정이다.
윤병구 선생은 1880년 서울에서 태어나 1897년 5월 한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한성사범학교 교사인 헐버트 박사의 영향을 받아 영어와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된 선생은 1899년 신학을 공부한 후 개성 남감리교회에서 목회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1903년 10월, 하와이로 건너간 선생은 호놀룰루에 조직된 한인 구국운동단체인 신민회(新民會)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1905년에는 하와이 한인사회 대표로 선출돼 이승만과 함께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하와이 한인동포들의 독립요청서를 직접 전달했다.
또한 헤이그특사 이상설과 이위종이 1907년 뉴욕에 도착하자 이들과 유럽각국을 순방하며 한국특사로 활동하는 등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열망을 전 세계에 알리는 구국외교활동을 전개하면서 미주 한인사회의 중추적인 인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미주 한인들의 결합과 독립운동방안을 모색하고자 1908년 덴버에서 이승만, 박용만 등과 북미 대한인 애국동지대표회를 개최한 선생은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를 중심으로 강제병탄 반대운동을 주도했다. 1912년에는 대한인국민회 제2대 총회장으로 선출돼 미주 각 지역으로 순회강연을 다니며 미주 한인들의 독립정신을 일깨우는데 앞장섰다.
선생은 1919년 3·1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대한인국민회 교섭위원으로 선출되었고,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1차 한인대회에 참가해 미국정부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청원서 작성자의 한사람으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1919년에 다시 한 번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으로 선출되는 등 대한인국민회에서 처음으로 중앙총회장을 두 번이나 역임하며 미주지역 한인사회의 통합과 독립운동을 이끌어나갔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직에서 물러난 선생은 목회자로 활동하면서 미주 한인들을 규합하고 항일독립운동에 힘을 쏟았다. 선생은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 항의서를 미국 후버 대통령과 의회에 제출했으며, 1943년에는 한족출정군인친족회를 조직해 태평양전쟁에 참전한 한인 청년들의 안전과 미국의 승리를 기원했다.
1945년 연합국이 UN창설을 논의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회의를 개최하자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단 중 한 사람으로 이승만 등과 함께 우리민족의 자주독립의지를 연합국에 알리는 선전외교활동에 힘을 쏟았다.
1949년 3월14일 하와이로 떠난 지 46년 만에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 선생은 외무부 고문 등으로 활동했고, 한미협약 초안 작성에 몰두하던 중 1949년 6월20일 갑자기 쓰러져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정리/이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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