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하마을에 마련된 故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공식 분향소
2009년 5월23일 아침에 ‘대한민국의 정치사’에서 일어나서는 안 될 일, 또 어떠한 언어로도 형언하기 어려운 ‘비보(悲報)’ 하나가 ‘호외(號外)’ 기사제목과 ‘특별보도’ 형태로 각종 언론에 이른 아침의 신선한 공기를 ‘칼바람소리’로 가르며 전국에 울려 퍼졌다.
그 비보는 다름 아닌 ‘대한민국의 제 16대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서거(逝去)하셨다’는 것으로 당일에 그것을 그냥 믿을 수 없는 또 믿기지도 않는 소식 이었다.
2009년 5월27일, 안성지역의 시민사회단체와 학생 정당인 일반인들이 동참해 밤길에 김해의 ‘봉하마을’로 향했다. 봉하마을로 가는 길은 안성에서 멀고도 먼 근 1000리길의 긴 노정(路程)이었다. 안성에서 19시15분에 출발해 김해의 진영읍 공설운동장 공영주차장에 도착한 것은 23시50분이 조금 넘어서였으니 약 4시간30여 분을 쉬지 않고 달려 내려간 셈이다.
진영읍내의 임시주차장인 진영공설운동장주변의 주차시설은 이미 그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차를 주차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초만원이었다. 안성지역의 정당, 시민단체 대표들과 그 대열의 끝이 아침까지 가도 셔틀버스를 타지 못할 상황인 것을 알고 상의한 후에 우리일행은 그곳에서 빈소가 마련된 봉하마을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어린 학생은 서로 교대로 업으며 약 6㎞ 정도의 거리를 걸어서 이동하는데 그 역시도 만만히 볼거리는 아니었다.
우리일행은 그렇게 떠밀리며 가던 중에 언론에 집중 포커스를 받은 김해시 진영읍내에 위치한 ‘세영병원’ 앞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그 병원의 벽면에 대형 조기(弔旗)가 걸려 있는 것을 보니 사고당일의 긴박했었을 상황이 병원의 네온불빛 아래로 아련히 스쳐지나간다.
그렇게 밀리고 밀려서 봉하마을 앞길 2㎞가량 동구밖까지 진열돼 있는 만장(輓章)을 보니 그간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믿고 싶지 않았던 또 믿기지 않았던 전직 대통령에 대한 충격적인 사건의 일면 일면의 내용들이 조금씩 나를 설득하고 있었다.
봉하 마을의 어귀에 죽 늘어선 몇천 몇만 개가 될지 모르는 만장과 그 아래 어두운 밤을 밝혀주며 활활타고 있는 촛불과 그곳 만장에 적혀 있는 만사(輓詞)를 보며, 주변일대에서 흘러나오는 슬픈 곡조(曲調)소리를 들으며 수많은 조문객의 군중에 떠밀려서 봉하마을의 빈소로 가고 있노라니 내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하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양 눈가에는 눈시울이 뜨겁게 글썽였다. 왜! 이렇게 눈시울이 뜨겁고 눈물이 자꾸 글썽이는 것일까!?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미묘한 서러움이 복받쳐 눈시울이 뜨겁더니 이내 두 줄기의 골수(骨髓)는 소리 없는 계수(溪水)가 되어 두 뺨에 물골을 냈다.
사실 필자는 우리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사람이지, ‘정치를 공부하는 사람’은 아니다. 더욱이 어느 특정의 정당을 지지하거나 가입해 소위 ‘정치적 색깔’을 내는 ‘정당인’은 더욱더 아님을 밝혀두고자 한다. 그런데도 어떤 ‘한 정치인(대통령)의 죽음’이라는 당면소식에 눈시울이 뜨겁고 마음의 한구석에 커다란 멍에를 뒤집어씌운 것처럼 착잡하고 괴로운 그 심정을 도저히 달랠 길이 없었다.
그 여운(餘韻)은 이내 두 뺨을 적시며 소리 없이 흐르는 물줄기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 통한의 눈시울과 소리 없이 흐르고 있는 여울은 본인의 직업병처럼, ‘대한민국의 현대정치사(現代政治史)의 비극(悲劇)’에 대한 1장면과 지난 과거시대의 ‘정치사(政治史)’를 뒤돌아보게끔 한다.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라고까지 하는 일부의 평가를 받던 당시의 이승만 대통령께서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치르고 다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는 ‘하야(下野)’를 하고 더욱이 ‘객사(客死:고국이 아닌 미국에서 사망)’를 했다. 또한 우리에게 소위 ‘새마을 정신’으로 1960~70년대 ‘한국경제의 기적을 이루었다’라고 평가를 받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믿고 신뢰하던 최측근 참모의 총탄에 시해된 요인.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께서는 한때 수인(囚人)을 하게 되었는지 한번쯤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김영삼 전 대통령께서는 한때 ‘IMF의 국가부도’를 초래하여 국민에게 ‘경제적 고통’ 과 ‘사회적 불안’을 안겨주고 ‘일부 가족과 측근 비리’로 얼룩이 되었다. 국민의 정부로 평가받던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는 ‘일부 가족비리’로 ‘사회적 물의를 야기’했었는지, 역사의 시계를 뒤돌아보니 지난 세월 속에서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전직 대통령 분들의 행보와 그 분들에 대한 ‘사회적 평가’와 ‘정치적 평가’를 생각해 보며 우리 ‘정치사(政治史)’를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지난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국민과의 소통’이라던가 혹은 ‘국민적 주권의 신장’은 ‘지난 정부들과는 사뭇 다르다’라고 하던 ‘사회적 평가’와 ‘정치적 평가’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에서 다시 평가를 받게 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 이러한 과거의 일들이 소위 ‘정치보복’이니 혹은 옛일의 ‘사화(史禍)’나 ‘사화(士禍)’ 같은 일들에 ‘비견(比肩)’될 수도 있다라고 ‘보는 일’ 등은 머나먼 역사의 시간여행을 타임머신을 타고 가는 ‘구시대의 유산물…’ 일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막상 노무현 전직 대통령께서 또다시 그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쏟아지는 모든 ‘돌팔매’의 상처와 ‘칼바람의 소리’들을 맞으시며 그 아픈 상처의 흔적과 무거운 짐을 역사의 수레바퀴인 ‘당신의 굴레 바퀴’에 모든 것을 싣고 떠나 버리셨다라고 생각을 하니, 그래서 눈시울이 더욱 뜨거웠고, 두 뺨에 두 줄기의 눈물이 흐른 것은 이제는 ‘노무현 전 대통령’, 혹은 ‘농부 노무현’, ‘이웃집 할아버지 노무현’… 등등의 표현으로 다시는 부를 수 없는 영영 돌아오지 못할 머나먼 역사의 뒤안길로 모습을 숨기고 있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故 盧武鉉 前 大統領)’의 모습으로 돌아가시려 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애통할 따름이었다.
4시간 가까운 추모행렬의 떠밀림 속에 드디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된 당신의 출생지 고향 봉하마을에 도착을 했다. 내 순번이 되어 국화꽃을 들고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빈소’에 마련된 영정 앞에 헌화분향의 조상(弔喪)을 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님 부디 편안히 영면 하소서…”라는 묵상의 독백(獨白)을 하고 돌아나오며 이제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원망의 대상’이 된 소위 ‘정치적 평가’에 ‘칼바람소리’를 타고 이를 시행에 옮기는데 ‘일조’한 ‘부엉이 바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가야할 시간에 쫓겨 부랴부랴 봉하마을을 빠져나오다시피 하여 나가는 대열 속에 합류했다.
떠밀려 나오던 중에 다 꺼진 촛불과 꺼져가던 촛불에 다시 불을 밝히고 있는 꼬마 어린아이를 보니 간밤의 씁쓸하고 어두웠던 일면은 이름 모를 그 꼬마 어린이의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촛불점화라는 환희(歡喜)의 모습에 가려지고 있었다.
그 모습은 봄바람에 어름 녹듯 전국의 신선한 아침공기를 갈기갈기 찢어놓은 그 요란한 ‘칼바람소리’와 함께 내 귓가에서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님 부디 편안히 영면 하소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