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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록(공군보라매리더십센터 연구처장) |
본보는 제48회 아산성웅이순신 축제를 맞이해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소장 장학곤) 주관으로 개최된 이순신축제 학술세미나의 발표논물을 주제별로 정리해 기획연재한다.
임진왜란의 발발과 수군지휘관 이순신과 원균
조선 수군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이순신과 원균은 모두 임진왜란 직전까지 북방에서 맹활약했던 육군지휘관이었다.
이순신은 문반가문 출신으로 22세까지 문과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축적된 학문적 기반과 문학적 재능이 보여주듯 전형적인 지장(智將)으로서 수군경험과 부대관리의 경험으로 임진왜란 발발이전 1년2개월의 주도면밀한 준비로 강력한 판옥선과 거북선의 제작 등 해양강군을 건설했다.
이에 비해 원균은 전형적인 무인기질을 가졌으며 임진왜란 발발 2개월 전에 경상우수사로 임명, 당시 고역으로 인식되던 수군역의 기피현상, 군액의 허실화, 전선의 부실 등 현실적으로 전란에 대비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4월13일 발발한 임진왜란이 겨우 보름 지난 4월28일 전후해 경상우수영을 지키지 못하고 일본군에게 노획될 각종 물자를 불태우고 퇴각한 점은 책임이 있다.
이순신과 원균이 처음부터 대립관계는 아니었다. 이순신은 원균을 구원하라는 조정의 명령에 따라 5월부터 원균과 합동작전을 펼쳐 5월6일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연전연승을 거두기 시작한다. 3차 출전이었던 7월6일 한산도 대첩을 앞두면서 두 사람의 의견은 갈라졌다.
원균은 자신의 경상우수영 관할의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수심이 얕고 암초가 많은 지형과 조류를 고려하지 못하고 견내량(경상남도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와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 사이에 위치한 좁은 해협.)에 위치한 일본군을 직접 공격할 것을 주장하고, 이순신은 판옥선처럼 대형전선이 작전하기 쉬운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해 집중공격을 구상했다.
전투가 종료된 뒤 이순신과 원균이 장계(狀啓: 왕명을 받고 지방에 나가 있는 신하가 중요한 일을 왕에게 보고하던 일. 또는 그런 문서.)를 올려 각각의 공적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갈등은 더욱 심해진다. 군사지휘관은 전투 이후 전공에 대한 보상을 명확하게 해야 위엄과 지휘·명령체계가 확립된다는 점에서 휘하 장수와 장병에 대한 포상은 중요했다. 1, 2차 출정까지 연명으로 장계를 올렸지만 3차에서부터 불화가 생긴 것이다.
지휘통솔 및 장재론(將才)의 측면에서 이순신과 원균
지휘통솔의 역량에서 보면, 이순신은 조정에서 수군을 폐하고 육군으로 전환하라는 명령에 강력하게 반대하고, 체계적으로 수군을 강화하기 위해 둔전(屯田: 변경이나 군사 요지에 주둔한 군대의 군량을 마련하기 위하여 설치한 토지. 군인이 직접 경작하는 경우와 농민에게 경작시켜 수확량의 일부를 거두어 가는 두 가지 경우가 있었다.)을 개발해 안정적인 전력증강의 기반을 삼고, 판옥선을 건조하고 거북선을 제작했다. 이를 위해서는 지휘관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휘하 장수들의 뛰어난 능력발휘와 철저한 복종, 그리고 각종 부역에 연해민들의 자발적인 지원이 필수적이었다. 일반 백성의 경우 강제력이 전무했지만 지역에 둔전을 개발해 생업을 보장하고 전시에 안정적인 생활을 보장함으로써 과중한 부역을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했다. 이순신의 리더십은 단순히 군령체계에 한정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순신과 연합과정에서 휘하 장수들이 재결집한 것을 보면 원균 역시 일정한 리더십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독단적이고 강제적인 성격이 강한 지회통솔은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지는 못했다. 특히 부하장수가 이순신에게 원균의 비리를 보고했던 사례와 선조실록에서 이순신의 뒤를 이어 수군을 통솔했을 때 장수들 사이에서 고립됐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손자병법에서 제시한 장재론적 요소인 지(智), 신(信), 인(仁), 용(勇), 엄(嚴)을 비교하면, 이순신은 학문적인 소양과 수군의 전략, 전술, 무기체계의 운용에 대한 지식 등을 기반으로 장병들의 무한한 신뢰를 얻었으며, 어진 성품을 바탕으로 군을 혼연일체로 만들어 불리한 전투도 승리로 이끄는 한편, 업중한 군율을 집행해 군의 기강을 바로잡았다.
원균은 형벌의 남발하며 믿음을 얻지 못했다. 또 ‘인’의 요소는 가장 취약함을 보인 부분으로 장병들간의 사랑과 존경이 매우 빈약해 무형전력의 취약함을 가져왔다. ‘용’의 부분에서는 한산도대첩에서 보여지듯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용감함으로 취약함을 드러냈고, 군율은 엄중하게 준행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순신과 원균의 상호인식과 통제사 교체
앞서 언급했듯이 1, 2차 연합작전까지는 협조관계에 있던 이순신과 원균은 3차 작전에서 경쟁의식이 발생하게 됐고 각각 장계를 올리면서 갈등은 커졌다.
쟁공의식에서 시작된 갈등은 서로 부정적인 인식으로 확대됐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원균뿐 아니라 휘하의 장수들의 언행에 대해 ‘형편없는 짓’, ‘흉계가 우습다’, ‘그의 흉모는 형언할 길이 없다’, ‘참으로 음흉하다’ 등 과격한 표현까지 사용했다.
원균도 이순신에 대한 반감을 여과 없이 표출했다. 특히 이순신이 파직된 뒤 삼도수군을 통제하자 장계를 올려 이순신이 작전지휘를 잘못해 일본군의 웃음거리가 됐다며 이순신과 휘하 장수들까지 죄인으로 처단하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이순신의 파직은 꼭 원균의 모함 때문은 아니었다. 당시 조선은 국난에 대해 적극적인 대응보다 명나라의 파병에 기대했고, 명나라는 자국의 군사손실을 최소화하고 일본의 요동진출을 차단하는 수준에서 강화회담을 통한 종전을 지향했다. 이러한 명의 의도는 조선을 ‘결전론’과 ‘강화론’으로 갈라지는 내분을 초래했다. 실제 이순신의 통제사 파직은 당시 조선 조정의 정세변화, 임진왜란의 교착화, 명·일간 지루하게 전개된 강화회담, 반대세력의 정치적 활동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이순신과 함께 일본군과 싸운 원균, 각각의 평가 필요해
이순신과 원균은 비록 공로와 활약상에서 차이가 많지만 임진왜란에서 철저하게 일본군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한 둘 다 임진왜란의 종료와 함께 전사함으로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졌다. 일개인의 우상화나 인기위주로 평가하지 말고 객관적이고 엄격한 사료비판과 조선시대 군사체제 및 보편적인 전황을 종합적으로 분석함으로서 각각을 평가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