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회 아산성웅이순신 축제를 맞이해 지난 21일 순천향대학교 향설기념 중앙도서관 5층 동아홀에서는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소장 장학곤) 주관으로 이순신축제 제1회 학술세미나가 개최됐다.
이날 세미나는 ‘충무공 이순신의 화합과 이해의 리더십’이란 주제로 이순신 장군의 주변인물을 통해 이순신 장군을 조명하는 새로운 관점에서 토론이 이뤄졌다.
주제발표는 ▶정해은 한국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의 ‘충무공 이순신과 선조-호성공신 선정 논란에 대한 검토를 중심으로’ ▶김경록 공군보라매리더십센터 연구처장의 ‘임진왜란 시기 수군지휘관 이순신과 원균’ ▶박재광 전쟁기념관 학예연구관의 ‘임진왜란기 이순신과 권율’ ▶조원래 순천향대교수의 ‘이순신과 정운-임진초기 녹도만호 정운의 활동과 전공’ ▶박정규 해군대학교수의 ‘이순신과 유성룡의 관계 재조명’ ▶장학곤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장의 ‘수군통제사 이순신과 우의정 정탁’ 등이다.
한편 본보에서는 6가지의 발제내용을 주제별로 정리해 기획연재 할 방침이다.
지난 21일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의 주관으로 이순신축제 제1회 학술세미나가 개최됐다.
충무공 이순신과 선조
호성공신 선정 논란에 대한 검토를 중심으로
정해은(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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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은(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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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이 발표문은 임진왜란 시기 국왕 선조와 이순신에 대한 여론을 바탕으로 1601년(선조34) 3월부터 1604년 10월까지 진행된 호성공신(扈聖功臣: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義州)까지 호종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훈호) 선정문제를 검토했다.
임진왜란기 선조의 연구는 이순신과 관련해 진행됐는데 ▶이순신 공을 인정하지 않으려 원균공 높인 점 ▶임진왜란에서 의병을 포함한 조선군 보다 명나라의 참전을 높이 평가 ▶호성공신은 86명이지만 선무공신(宣武功臣: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이순신·권율(權慄) 등 무신에게 준 훈)은 18인에 불과한 점 등이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녹훈도감이 2개월만에 혁파되는 등 임진왜란 극복의 공을 돌리는데 있어 선조와 대신들 간 공신논의를 두고 갈등을 빚은 것으로 나타났고 선정과정을 선조의 시각에서 재검토했다. 이 논고를 통해 호성공신의 선정이 실제로 호종신하들의 공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조의 공로를 공인하는 과정이 밝혀질 것이다.
임진왜란기 여론의 동향
실추된 국왕의 위신
1592년(선조25) 4월13일 오후 5시 무렵 조선침략 선봉군 1만7000여 명을 태운 일본의 군선 700여 척이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고 다음날 상륙하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됐다. 일본군은 승승장구했고 선조는 4월30일 돈의문(서대문)을 거쳐 북쪽으로 피신했고, 5월1일 개성, 5월7일 평양, 6월21일 의주에 도착했다.
선조는 내부(內附: 한 나라가 다른 나라 안으로 들어가 붙음)까지 심각하게 고려하면서 결국 유성룡, 정철 등의 신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명나라로의 망명을 결정했고, 이에 따라 대내적으로는 국민들이 관아기둥에 ‘임금이 의주로 피난했다’는 내용의 글을 적어 일본군에게 알려줄 정도로 민심이 돌아섰고 대외적으로는 명나라 사신에 굴욕적인 대접을 받으며 왕위교체론까지 공공연하게 들고 나오는 등 입지가 위태로웠다.
종전 이후 추락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불거져 나온 문제가 공신선정 논란이다.
이순신에 대한 평판
이순신은 1591년(선조24) 2월 전라좌수사에 임명되고 5월7일 옥포해전, 29일 사천해전, 6월2일 당포해전, 5일 당항포해전, 7월8일 한산도대첩 등 연승하며 대신들과 국민들에게 희망이 됐다.
그러나 1594년 중반기 이후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선조는 이순신의 동향에 예의주시하며 대신이나 남쪽 정세를 살피고 온 신하에게 이순신에 대해 처음엔 힘껏 싸웠으나 그 뒤로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는 일이 없으므로 의심스럽다고 토로하는 등 부정적인 심기를 노골적으로 들어냈다.
결국 1597년 사형을 이끌어냈지만 정유재란이 발발하고 원균이 참패하자 이순신을 복귀시키게 됐고, 이를 기점으로 명나라 인사 및 지휘부도 이순신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면서 국제적인 인물로 부각됐다. 이순신이 전사하사 명나라에서는 애도와 함께 포상을 결정했지만 선조는 공적을 쉽게 인정하지 못했다.
호성공신 선정 논란
누가 명군을 조선에 오게 했는가?
선조가 공신을 선정한 것은 1601년 3월 시작해 1604년 10월에서야 마무리 돼, 무려 3년8개월의 기간이 소요되면서 호종공신 86인과 선무공신 18인을 선정했다.
이처럼 오래 걸린 것은 호종공신의 칭호에 ‘회복’의 의미를 두라는 선조의 요구가 시작되면서 공신도감과의 대립이 첨예해졌기 때문이다. 당시 국권의 ‘회복’은 명나라 군대의 역할임에 공감하며 공을 치켜세우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임금을 보필한 호종의 공이 아닌 ‘회복’의 공은 받을 수 없다며 고사한 대신들이 많았다. 논의 끝에 결국 선조의 공이 가장 크다는 결론이 나왔다.
또 호성공신 86인 가운데 내시들과 하인 등도 포함시키라는 요구에도 갈등이 생겼고, 선조는 호종하지 않은 대신들에게 논의할 자격이 없다고 문책하며 존호까지 받는 등 신하들에게 왜적을 무리친 가장 큰 공로를 세운 인물로 추대받은 셈이 됐다.
맺음말
결국 선조는 외형적으로 호성공신에 선정에 있어, ‘호종’한 신하들의 공을 높이고 의병이나 무관의 공을 깎으려는 의도 뿐 아니라 왜적을 물리친 가장 큰 공로를 자신에게 돌리며 호성공신 선정에 최대 수혜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