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암 장정섭(51)화백을 만나
보내온 팜플릿을 보고 작품에 반했다. 오픈식은 지난 10일(월) 열렸지만 느긋한 감상을 원해 12일(수) 한적한 시간대에 천안시민회관 전시실을 찾았다.
혼자 보는 맛에 빠졌고 이내 첫작품부터 눈길을 떼기가 어려웠다. 한번의 붓놀림에 만가지 형상을 볼 수 있다는 건 흔치 않는 기회다. 문인화면서 선을 단순화한 몰골화법, 게다가 일필휘지의 작화였다. 30점의 작품을 다 보고 나서 또한번 보고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작품은 비움을 담아내는데 주저없는데 이런 욕망은 주제넘는다 싶어 잠깐 망설이다 그만 뒀다.
작가와 대화하고픈 생각에 아침부터 전화했건만 받질 않아 섭섭했다. 작업실은 안성에 두고, 사는 곳은 서울이니 전시실에서 만난다는 것도 쉽지 않겠다는 생각은 작가를 만남으로서 깨졌다.
“선끼를 찾아 수십·수백 번의 파지를 버리며 하나의 작품을 만듭니다. 선에 신령이 담겨야 비로소 작품다운 모양새가 나오죠.” 작가는 동양철학에 심취해 있었다. 불교나 선도의 세계가 다분하지만 특히 공자와 장자의 사상을 동경하는 마음이 작품에도 고스란히 녹아있다.
“대상에서 최소한의 상징적 요소만 취했어요. 표정과 자태, 정과 동의 대비, 통일감과 비례감을 통해 합일된 세계를 표출하고자 했습니다.” 단순의 궁극엔 생급한 단순, 즉 현상이 있지만 없고, 없지만 있는 세계에 도달하며 이는 유무가 현묘한 양면성으로 조화된 세계라고 설명한다.
작가의 작품에는 세련됨이 엿보인다. 화려하진 않아도 일반인에게는 접근할 수 없는 현란함이다. “예전보다는 확실히 세련된 맛이 느껴집니다. 자칫 ‘천끼’로 발전할 수 있죠.” 그가 말하는 천끼는 천한 끼를 말한다. ‘사족’ 또는 ‘과유불급’처럼 기교가 부족해도 문제지만 넘쳐도 천해진다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앞으로는 작품 자체의 깊이에 몰두하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또 초심처럼 순수한 기교로 돌아가고프다는 말도 한다. 작가의 말 속에서 최고의 경지에 입문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단순화를 통해 상대적인 여백이 많은 것도 작품의 특징이다. “채움은 ‘채울 수 없을 때까지’라는 한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채움의 본질은 채워야 하는 성질의 것이므로 채워야 합니다. 반면 비움의 본질은 담지 않는 성질의 것이므로 담을 것도, 담지 않을 것도 없습니다.”
작가는 그것이 회화의 도란다. 현묘한 조화로 있고 없고를 초월하는 것, 인위는 형상을 갖추지만 무위는 형상을 갖추지 않는 것, 그의 단순화한 작품이 그 이치를 차용했기에 작품에 어리는 인위는 곧 무위로 찾아들며 관념적 유희로 빠져들게 한다.
지암 화백의 작품세계를 엿본 시인 임향은 ‘묵향에 세월 말아 훌훌 마시며/ 흙처럼/ 산처럼/ 물따라 구름처럼/ 풀어온 화혼/ 버려 비우고/ 더 버릴 것 없어/ 바람처럼/ 여여(如如)로운/ 예인의 불혼/ 활활타고 있어라’며 그를 일컬었다.
독학으로 그림을 배우고, 젊은 한때 명화를 모작하며 생활하기도 했던 작가는 ‘하루 살되 백년 살 듯 하라’는 말을 가슴 깊이 새기고 은둔 10년 만에 2번째 개인전을 가졌다. 손을 놓으면 굳는다고 하루 서너 시간씩은 붓을 붙잡고, 누가 물으면 “붓장난 하고 있다”고 대답하는 그. 가족과 떨어져서도 “혼자 있으니 나를 잘 보게 되더라”는 그의 작품세계가 오늘(15일)까지만 시민회관 전시실에 펼쳐짐이 안타깝다.
작품도 그러려니와 사상과 그림에의 순수열정에 반해 돌아나오는 길엔 어느새 장정섭 작가의 팬이 돼버렸다.